•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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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평화를 연주하는 사람을 말한다면, 베토벤의 교향시 No.9 을 지휘하는 지휘자나 그의 오케스트라만은 아닐 것이다. 유엔에서 앞장서서 활동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평화를 지휘하고 연주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손에 들고 있던 칼과 창을 제단의 돌 위에 올려놓고, 질곡이 깊어진 두 사람,  남편과 아내, 두 마을, 두 민족들, 나라와 나라가 함께 모여 머리와 가슴을 마주하고, 말로서 토론하며 설복함으로써 평화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고대인들의 염원을 실천에 옮겨보려는 시도가 U.N.기구를 창설케 된 이유일 것이다.  
 이 평화에 관해서는, 좀 더 많은 묵상과 구체적인 제안과 실천과 관련해서, 성경만큼이나 많이 다룬 책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경전이 묶어진 팔레스타인은 강대국들의 세력 확장에 교두보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에 언제나 평화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 아브라함 족장시대부터 평화의 왕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평화의 도시로 일컫는 예루살렘의 고대왕국인, 살렘을 다스리는 임금의 이름이 멜기세덱이다. ‘멜기’라는 말은 ‘임금’이란 말이고, ‘세덱’이란 말은 ‘정의’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의 ‘정의의 임금’이란 이름과는 달리,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을 행사하는 ‘왕 같은 제사장’ 사역이었다. 전쟁이 끊이질 아니하고, 강대국들의 대국굴기에 교두보로 이용되는 그 땅에, 정의가 실천되고 평화가 이뤄지려면, 칼의 힘만으로는 평화를 가져올 수 없고, 오로지 믿음과 말과 설복으로써 이뤄져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말씀에서도 강조되는 바와 같이,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하게 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는 길은 원수 갚는 것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은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선으로써 악을 이길 수 있도록 비결을 찾고, 위에서부터 공급되는, 차원 높은 전략과 전술 능력을 키우는 학습에 힘써야 했다.
 검은 돌비에 그려진 하무라비 법전의 그림에서와 같이, 고대인들은 왕권과 지도력을 신으로부터 하사받는 것이라 생각하였고, 이를 이용해서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신으로부터 그 왕권을 상징하는 동그란 원과 통치능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받는 모습이 돌비에 각인되어 있다. 시편 110편에 기재된 노랫말도, 야훼 하나님께로부터 권능의 홀을 하사 받은 자라야 적들을 물리칠 수 있고, 바르게 의를 행사하여, 평화를 가져오는 임금이 된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멜기세덱 같은 임금의 등장을 노래함은 왜일까? 이스라엘의 선지자들과 시인들은 유다 왕국의 역사를 통해서 쓰라린 눈물을 맛보았다. 다윗의 왕조가 무너졌고, 제사장들 역시 타락하였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가 함께 무너진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실제로 사람의 계열이나 집단에 대해서 많은 실망을 얻었다. 더더욱 마카베오 형제들이 왕권과 대제사장직과 성전 금고를 차지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시민들은 통치자에게서도, 종교지도자들에게서도 소망을 접어야만 했다. 그래서 등장한 다니엘서의 메시아 상은 인간의 혈통을 배제하고, 오로지 위에서부터 구름을 타고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한다. 히브리서에서도 논증된 바와 같이, 사람의 계통을 밟은 지도자가 아닌, 시작도 끝도 없는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 제사장 같은 평화를 가져오는 왕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평화를 만들고 의를 세우는 사람의 하나님왕국을 선포하였다. 예수께서 오신지 이천년을 넘겼지만, 세상은 대부분 서로를 해하려는 칼을 하나님께 바치질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독일 교회는 무력에 의해서 갈라진 동서의 깊은 골을 기도로서 봉합하고, 굳게 막혔던 동서의 벽들을 허물어 낼 수 있었다. 이 화합의 환희는 어느 날 갑작스레 댐이 터지듯이 우리 인류에게 밀려들어 와서는 환희의 잔치를 배설하였다. 오늘의 독일의 수상이 홀로고스트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에서, 우린 평화가 무엇인지를 알 것만 갔다.
 시편의 기자는, 권능의 홀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왕 같은 제사장에게, 젊은이들이 새벽이슬 맺히듯이 그 앞으로 나아온다고 선포한다. 이 땅은 과거 백년 훨씬 이전부터, 새벽이슬이 대지의 산천초목을 흠뻑 적시듯이, 수많은 젊은이들이 새벽이슬처럼 일어나서 아침이슬 같이 사라져 버렸다. 저들이 흘린 붉은 선혈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이유가 있다. 아직껏 우리의 땅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고, 북에는 우리의 형제요 피로 맺어진 겨레가 처절한 기아와, 인권이 짓밟혀져 있기 때문이다. 광복 七0年의 아침, 남과 북으로 나뉜 조국의 대지를 새벽이슬 같이 흠뻑 적시는 청년들의 평화의 행진은 이미 시작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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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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