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3(화)
 
1.jpg
 
◇참회(讖悔)와 회개(悔改)는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그 뜻은 많은 차이를 갖는다. 불교에서 쓰는 참회는 뉘우칠 참(讖), 뉘우칠 회(悔)이다. 앞의 뉘우칠 참은 자신이 지난 과거의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고, 뒤의 뉘우칠 회는 앞으로 저지를 수 있는 잘못에 대해 뉘우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쓰는 회개는 뉘우칠 회(悔), 고칠 개(改)이다. 앞의 뉘우칠 회는 지난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것이고, 뒤의 고칠 개는 앞으로 그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일에 대해 두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悔)는 많으나 거기에 개(改)가 따르지 않는다면 온전한 회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회개는 잘못된 죄의 길로 가던 것을 돌이키는 것이다. 그 길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길임을 알았다면 돌이켜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는 것이 회개이다. 그런데 상습범들의 회개는 잘못을 깨달았다며 용서해 달라고 울고불고 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또 그 길로 들어서 같은 죄를 저지른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회개가 이 상습범들의 회개와 닮았다. 하나님 앞에 모여서 회개기도를 할 때는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어놓고 얼마 못가 다시 그 이전의 길로 간다. 죄로부터 잠간 돌이켰다가 다시 되돌아 간 것이다. 그리고는 지난 번에 용서받은 잘못을 또 하나님 앞에 꺼내놓고 용서해 달라고 빈다.
◇참회는 스스로 깨달아 조심해 남에게 해(害)를 끼치지 않는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며, 회개는 하나님에게 잘못을 용서받고 사람이 완전히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았다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설교의 주제는 언제나 ‘회개’여야 한다. 회개 없이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회개는 많으나 변화가 없는 이유는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복과 축복은 서로간에 경쟁심만 부추길 뿐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지 못한다. 기독교의 생명력은 회개에 있다.
◇천국에 합당한 백성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은 사람들이다(행 3:19).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마 3:2, 8-9)고 선언했다. 예수님 또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눅 5:32)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설교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는 것”(행 20:21)이었다. 하나님을 등지고 죄를 향해 가던 사람이 성도(聖徒)가 되려면 그 길을 돌이켜 한번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이것이 즉 ‘구원의 회개’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삶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유혹과 실수에 대한 ‘성화의 회개’도 항상 해야 한다. 이것이 곧 온전한 회개(悔改)이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참회’와 ‘회개’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