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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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70년 이후 예루살렘이 붕괴되고 성전이 무너진 후에 유대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유대 중심의 축은 제사장에게서 랍비들에게 넘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성전 중심의 유대종교가 막을 내리고, 유대교가 존폐의 위기에 서게 되자,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의 손자(가말리엘 2세)는 회당 예배에서 드리는 18기도문 중에 12번째에다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크리스천들을 이단으로 몰아 저주하는 문구를 삽입하였다. 이 기도문이 추가된 이후로는 숨어서 예수를 믿고 따르던 이들도 회당 예배에는 참석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에 따른 기독교의 대처도 예민하여 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 이후 유대교와는 영영 결별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등장하게 된 요한복음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거리를 두게 되는 차이점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는데, 바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이들에게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임재 하여 계심을 증언하고 설명하였다. 유대교와는 달리 그 걷는 길이 다르고 생명과 근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믿는 예수가 우리의 참 생명이시고, 우리가 걷는 참 길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의 임재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특정한 인물 소수에게 나타났지만,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믿는 이들은 누구든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되는데, 이는 우리 믿는 이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킨 것이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그의 제자들이 모인 곳에 방문하셨을 때에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시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주시는 생명의 본질이 성령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고, 예수님의 말씀과 희생만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이 기록되어질 시기에는 이미 구 성전이 붕괴되고 살아진 이후였다. 허지만 그 성전이 상징하는 유대교가 붕괴된 자리에서 율법종교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요한복음 서두에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후에 다시 세우리라’하신 선언은 요한 공동체가 유대종교에 대한 대처를 바르게 잘 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예수를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도 ‘네가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 하신 것이나, 수가성의 여인에게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때가 도래하였음을 선포하신 말씀 그 모두가, 유대교는 지금까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만이 참된 하나님의 메시아이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야 성령이 내재하시는 공동체임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이의 거룩하신 영(聖靈)만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에,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그가 받은 성령과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거주하시는 장막이 되고, 성령과 함께 걷고 사역하는 성령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저들이 모인 공동체 역시 성령이 내주하시고 운행하시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유기체가(organism) 되는 것이다.
이 처음 원시교회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얼마나 강도 높게 경험하였던지, 저들은 말하기를 성령의 기름부음이 저들을 가르친다 하였다. 율법의 선생이며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하나님을 뵙는다 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독생자(獨種子)를 알아보질 아니하고 나무에 매달아 처참하게 희생시킨 자들이, 성령의 임재 가운데에서 그 일을 자행했으리라고는 만무할 것이다. 더욱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전하는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충만하였지만, 스데반을 돌로 희생시킨 사울과 산헤드린은 성령으로 하였다는 말은 못할 것이다. 율법을 길로 알고 진리로 알고 생명으로 알았던 이들은 육을 따른 것일 뿐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과거에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전과 너무 흡사하다. 한국교회는 성령을 너무나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교회에 가둔 로마교회를 향하여 바벨론 포로에서의 자유를 선언한 루터는, 무엇을 어떻게 보았기에 그리 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성령이 참여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유기체라 할 수 있을까?  요한 공동체는 얼마나 민감하였기에 성령이 강물처럼 흐르는 교회를 말할 수 있었을까?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교회, 에스겔이 보았던 생수가 솟아나 넘쳐흐르는 교회를, 과연 볼 수는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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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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