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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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경에서, 지식인들이 그들이 배우고 익힌 지식의 한계에서 맴도는 것들을 접할 수 있었다. 모세와 같은 인물은 이집트의 궁중에서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로부터 지식을 배우고 익힌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동족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하여 당시 어느 제국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모든 국민이 평등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개개인들이 누구의 억압이나 통제 없이도, 스스로가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회집단을 이룰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제국들의 종교는 제국 안에 귀속된 종교들로서, 제국을 위한 종교로서 사회체제를 유지하려는 데에 급급하여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에만 연연하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였다. 우리 역사에서도 보여 지듯이 ‘안국사’와 같은 절은 국가의 안녕과 평안을 빌어주는 절로서, 종교가 국가를 위한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가 한 국가적 이기주의를 넘어서질 못하면 타락하기 마련이다. 종교가 권력에 아부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 도구화 되면, 그 국가 사회도 타락하기 마련이고, 백성들도 그들의 종교를 집어내 던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종교가 타락을 하면 국가 역시 병들게 되고, 국가를 유지하는 기본 요소들이 타락하여져서 더 이상 그 사회를 유지하기에 버거워지는 것이었다. 지난날의 삼국 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몰락은 모두 그 당시 종교와 역학 관계에 놓인 것이다. 조선이 들어설 때에 아예 불교를 내던지고 유교를 받아들인 이유도 나라를 살려 보려고 한 결과였다. 어디 이뿐이던가? 조선 말기가 되면서 국가가 기울어지게 되자, 유교를 내어던지고 기독교로 시집을 오게 된 연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에 있음을 역사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공공연한 TV 강좌에서 한 유명 강사가, ‘기우제를 지냈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제사상을 뒤엎는다.’ 하였다. 종교가 마치 인간의 복리에 길들여진 그 무엇처럼 되어 진 모양새이다. 요즈음 우리의 기독교는 머리 위에서 비쳐주는 빛과 같이,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내어주고, 생명의 가이드라인처럼 비쳐지기 보다는, 사람들의 소유욕에 도구화 된 듯한, 마치 유대교가 소금이 제 맛을 잃은 나머지 길가에 버려져서,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겪이 되었듯이, 로마 제국 하에 붕괴된 주후 1세기의 팔레스타인의 종교와 흡사하다.
젊은 랍비 예수에게 찾아온 유대 최고봉의 학자 니고데모는,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가르침을 흘려버리고는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종교가 위의 차원을 부끄러워한 나머지, 땅에서 익히고 경험된 것만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아가면, 그 백성들도 땅에서 위로 올려 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는 위에서 오는 것으로 우릴 세상에서 구원하셨다. 위에서 오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서, 예수가 십자가를 지는 것을 가리킨 것이었다. 예수는 그의 백성을 십자가로 포용하고, 땅에서 번쩍 들리어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에 속한 시민들이 되게 한 것이었다. 예수는 그의 공생에 기간 동안 줄곧 위로부터 오는 성령으로 충만하였는데, 그가 본 것이 바로 ‘십자가’이었다.
유대 랍비들은 듣고 가르쳤다. 그들의 전통과 선배 랍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었고, 아버지가 보여주시는 대로 가르치며 사역하였다. 예수가 활동하던 세상은 다윗 같은 정치적 메시아나, 모세와 같은 메시아를 흉내 내는, 짝퉁 메시아들에게 식상한 세대들이었다. 쿰란으로 잠적한 공동체나, 이집트로 철수한 70인 경을 번역한 제사장 그룹들이 이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적어도 스룹바벨의 제 2성전 이후, 유대백성들은 마카비우스 형제들의 난을 겪게 되면서 실망한 나머지, 다니엘이 말하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메시아인 바로 그 ‘인자’를 기대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 대다수는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자’이신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이르신, ‘위로부터 태어남’에 대한 가르침을 간과하고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음에 실패한다. 수가성에서 정오에 예수를 직면한 사마리아 여인과 그의 백성들은 구원을 받지만, 산 위의 동리 유다 성의 랍비가 다시 어둠에 묻힘은 왜일까? 우리가 오늘도 니고데모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의 대표자들이 왜 성령의 역사와 활동을 그들의 교회 규격에 맞추려 하는 것일까? 신학자들마저도 교회론에 길들여진 성령을 주장함은 왜일까? 저들마저도 어둠속에서 나타났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 니고데모의 후손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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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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