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무신론적 사회에서 성장한 동독시민들에 대한 어려움 직면


1. 1945년 이후 독일교회의 설립과 역사
하나님은 인간에게 과거를 되돌아 봄으로 미래를 더욱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작게는 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 봄으로 곧 있을 미래가 어찌 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크게는 한 공동체와 민족이 과거를 되돌아 봄으로 현재와 미래 속에서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지혜를 주셨다. 역사는 이 같은 지혜의 여정 속에서 이정표를 찾는 것이다.

1) 독일 개신교회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과 EKD의 설립
(1) 2차 대전 이후 독일교회의 상황
독일과 독일교회는 1945년 히틀러 정권의 몰락과 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인해 역사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2차 대전의 패배로 독일은 모든 것을 잃었고, 국토 역시 1/3을 잃어야 했다. 패전한 독일이 소련과 폴란드에 양도한 동부지역은 개신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살던 지역이었다. 그 결과 과거 독일의 영광과 독일기독교를 이끌었던 프로이센 주 지역의 개신교회는 급속도로 약해졌다.
또한 연합군의 철저한 파괴로 인해 인구 10만명 이상의 도시들은 거진 잿더미가 되었고, 경제구조 역시 완전히 멈춰버려 대다수의 국민들이 기아와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더해 과거 동부유럽의 점령지에 거주했던 수 많은 독일인들이 종전 이후 추방 당해 독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또한 승전국들의 동서 냉전은 독일의 분단으로 이어졌고, 이는 독일 개신교회에 이중, 삼중의 부담이 되었다. 특별히 전통적으로 인구의 90% 이상이 개신교인이었던 동독지역에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한 유물론적 사상과 교육으로 교회는 과거 나치 치하에서와 같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 공산주의와 교회의 투쟁에서 교회는 번번히 패배하고, 급기야 동독지역의 교회는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2) EKD 설립
나치와 그 어용기관이었던 독일 기독교도(Deutsch Christen)에 대항한 고백교회의 키르헨캄프(Kirchenkampf: 교회의 투쟁)는 히틀러라는 적그리스도에 대항해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나치의 탄압에 의해서 독일 복음주의교회는 황폐화 되었고, 대다수의 교회는 와해에 가까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나마 온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교회는 몇몇 주교회(州敎會, die Landeskirche)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위텐버그(Wu¨rttemberg) 주교회는 거의 손상을 입지 않고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온건파로 분류되었던 위텐버그 주(州)의 감독인 테오필 부엄(Theophil Wurm)의 탁월한 리더쉽으로 가능했다. 그는 노련한 목회자이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감독이었으며, 통합의 리더쉽을 가진 사람이었다.
교회 투쟁은 당시 두 개의 축이 중심이 되었다. 그 첫째는 교회 투쟁의 전면에서 나치와의 극한 충돌을 마다하지 않은 마틴 니뮬러, 본회퍼 등의 소장파 목회자 중심의 그룹과 주교회(州敎會)라는 조직을 가지고 교회의 공식적인 의사결정구조 안에서 온건적 투쟁을 이끌었던 그룹이었다.
현재 독일교회를 대표하는 EKD(즉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는 위의 두 축이 함께 모인 고백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연합체이다. 특별히 고백교회가 1934년 바르멘에서 발표한 바르멘신학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a¨rung)은 오늘날 EKD의 정신을 명확히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3) 바르멘 신학선언
루터파, 개혁파, 연합파 신학자들이 함께 모였던 고백교회 총회에서 발표되었던 “바르멘 신학선언”의 주 내용은 그리스도교와 나치즘과의 통합은 그것이 교회의 포고이든 직제이든 성서계시에 위배되며, 교회는 이를 배척한다는 선언이었다.
“성서에서 증거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그 말씀에 귀 기울여서 살든지 죽든지 믿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거짓 교회를 배격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다른 사건이나 권세, 상징과 진리들을 하나님의 계시로 선언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고 또 인정해서도 안된다”고 선언한다.
바르멘 신학선언 작성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칼 바르트는 이 일로 1935년 본 대학 신학교수직을 잃게 되었고, 그 후 스위스 바젤 대학으로 옮긴 뒤 고백교회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바르트의 계시신학을 통해 교회 투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4) EKD의 설립과 스튜트가르트 죄책고백
나치라는 공동의 적을 놓고 함께 싸웠던 고백교회의 크고 작은 세력들은 새롭게 시작될 독일 복음주의교회의 미래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으로 갈등을 갖는다. 보수적 성향의 그룹들은 앞으로의 독일교회가 민족적 전통 위에서 루터 신앙고백을 근간으로 한 루터교회 중심의 독일교회가 되길 바랬고,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그룹에서는 루터교회와 개혁교회가 함께 투쟁한 고백교회 전통 아래 개신교 교파 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연합이 있길 바랬다.
이러한 교회 정치적 갈등을 유연하게 중재한 사람이 바로 부엄 주교였다. 그의 중재를 힘입어 1948년 7월 루터의 교향인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열린 독일개신교회 전국 총회에서 ‘독일 복음주의교회’(EKD)의 기본법이 제정됐다. 이 기본법에서 독일 복음주의교회는 “루터파, 개혁파, 연합파 교회들의 연맹”임을 천명했다. EKD는 하나의 교회라기 보다는 다양한 신앙고백을 포함한 개신교연합회이다. 개신교회는 국가와 사회를 향한 대외적인 관계를 EKD를 통해서 처리하고, 또한 국제적인 교회 연합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통적으로 루터교회는 로마서 13장의 해석에 근거해 정부당국에 대한 비정치적이고 무비판적인 복종을 교회의 자리로 간주했다. 하지만 나치 정권에 대항한 교회투쟁과 개혁주의신앙의 영향으로 전후 교회는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인이며 독일인이라는 민족적 개신교주의는 점점 여려졌고, 이러한 연장선 위에서 교회는 국가나 민족과는 독립적으로 비판적 연대를 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1945년 10월 전후 가장 중요한 독일교회의 문서인 “스튜트가르트 죄책고백”이 나오게 된 것이다.
기실 이 고백은 독일민족과 교회를 향한 시대적 압력의 소산이었다. 고백교회의 격렬한 투쟁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독일교회는 나치 정권의 탄생에 협력한 원죄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미국 등 서방의 입장에서 조금씩 가열되는 냉전의 분위기 속에 독일의 복구를 서둘려야 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독일의 과거사의 반성을 선포할 이벤트(Event)가 필요했다. 이 역할을 독일교회가 맡게 된 것이다.
EKD의 대표들은 “우리들은 우리 독일민족으로 인해 여러 나라와 민족들에게 끝없이 많은 고통을 준 것에 동참했음을 고백한다”며 독일교회의 죄를 고백했다. 하지만 이 선언은 정치적으로 무척 예민했기 때문에 독일 안에서의 공개가 한동안 미뤄졌고, 오히려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 먼저 공개됐다. 어쨌든 이런 교회의 노력으로 독일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로 일관하던 세계 여론은 곧 바뀌게 되었고,  또한 세계적인 교회연합운동의 중요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계기를 만들게 됐다.

2. 독일교회의 에큐메니컬운동

1) 로이엔베르크( Leuenberg) 합의
1948년 아이제나흐에서 창립한 EKD의 기본 강령에서 EKD는 “루터교회, 개혁교회, 연합교회의 연합”임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는 교리적 입장으로 인해 함께 성만찬을 할 수 없었다(오늘날에도 동방 정교회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장로교 교인이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
이는 종교개혁 당시 루터와 츠빙글리의 신학적 차이에서 유래되어 서로가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이에 EKD는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여러 시도들을 했었지만 매번 큰 저항을 받고 말았다. 하지만 EKD는 10년 이상 꾸준히 대화한 결과 1957년 “아놀스하인 테제”(Arnoldshariner Thesen)를 이끌어 냈다.
루터파, 개혁파, 연합파 교회의 신앙고백을 연구한 신학자들이 신약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성찬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71년 ‘로이엔베르크합의서’(Leuenberger Konkordie)를 발표하게 되고, 이를 통해 EKD 안에서 개혁교회 간의 온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 합의서는 교회연합이 아닌 교회공동체의 천명과 실현을 목표로 한다. 이 교회 공동체란 여러 다른 신앙고백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사(聖事)에 대한 복음서 이해에 공동체 상호 간의 일치를 유지하며 가능한 한 복음의 큰 공동체로 세상에 봉사함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2) 개신교 타 교파와의 교류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의 연합과 교류뿐만 아니라, 1986/87년 감리교회와도 설교와 성례전을 공식적으로 교류하기로 했고, 가톨릭교회와도 상호간에 성찬식 때 초대를 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메노나이트파 교회와도 세례에 대한 몇몇 입장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에 대해서 인정하는 노력들이 있어왔다.

3. 동독개신교연합(BED) 설립과 동서독 교회의 분리

1)동독에서의 교회 : 동독개신교회의 분리
교회의 자유를 보장한 서독지역의 정책과는 달리 동독지역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의 충돌로 교회는 다시금 서서히 자신들의 자리를 상실하게 된다. 특별히 1954년 3월 동독 공산당 정치부는 교회에 대한 투쟁을 결의하게 되고,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 교회와 미래세대의 단절을 꾀하게 된다. 동독 공산당은 14-15세 청소년들이 국가와 사회주의 사회에 충성을 서약케 하는 ‘성년식촉구’를 공포하므로써 교회와의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다. 교회는 이 의식을 무신론을 정점으로 한 우상숭배로 간주했다.
동독교회 지도부는 나름 자신만만했지만 1년 후 교회를 지탱했던 중산층 대다수가 동독을 떠나고, 남은 이들은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해 교회를 떠나므로 이 투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1956년 동독 지역에 거주하는 세례교인의 90%가 성찬식에 참석했지만 그 수는 3년 안에 1/3로 줄었고, 교회 탈퇴자 수가 점점 늘어 국가교회(國家敎會)는 붕괴되고 만다.
또한 1956년 초 교회세 징수도 법적으로 불허되어 교회는 더욱 궁지로 몰리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독교회는 점점 동독 공산당의 이념 속에 흡수되므로 그들의 생존을 이어갔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의 건설은 독일개신교회 역시 둘로 갈라지는 순간이었다. 이로인해 초기 EKD는 총회를 지역으로 갈라서 개최했다. 각 주교회(州敎會)의 감독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EKD는 점점 분열의 길을 걷게 된다. 1968년 봄에 나온 동독의 새로운 사회주의 헌법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공산당이 최종 결정권을 갖는다고 했다. 또한 이 법의 통과로 동부 지역의 8개 교회는 EKD로부터 분리되어 동독교회연맹(BEK)를 결정하게 되었다.
 
4. 통일과 통일 이후의 독일교회
냉전시대 독일교회는 철저하게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교회의 전통 아래서 동서독 교회는 서로 교류를 가졌다. 특별히 서독교회는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으로 동독교회를 지원하였고, 이러한 지원을 통해서 교회는 동서독 안에 있는 적개심과 불신을 조금씩 제거해 나갔다. 특별히 신학자들의 만남과 대화를 통한 교류, 교회연합운동 안에서의 정의, 평화, 창조질서를 위한 대화 등을 통해서 대화를 풍성히 이어갈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만남 역시 철저히 서로의 체제 선전 목적 아래서 허락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남은 관계를 만드는 열쇠가 되었다.
20여년 간 나뉘었던 동서독 교회는 1989년 정치적 지형의 변화와 기대치 못했던 여러 상황들로 인해서 갑작스레 통일을 맞게 되고, 이는 교회의 통일로 이어졌다. 사실 교회의 통일이나 연합의 개념이 아니라 동부 주교회들이 1968년 상황적 한계로 인해 포기한 ‘독일복음주의교회’의 회원 자격을 다시금 회복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런 통합 안에서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먼저는 동독지역의 교회가 너무나 허약해져 자립이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었다. 또한 무신론적 사회 속에서 성장한 동독시민과 사회주의 속의 교회를 표방한 동독교회의 리더쉽 속에서 동독교회는 아직까지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독일 튀빙엔/강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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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5주년 기념특집 / 1945년 이후 독일교회의 역사와 오늘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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