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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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해가 바뀌면, 많은 교역자들이 지금까지 온 몸으로 섬기며 사역하던 교회에서 짐을 내려놓고 은퇴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은퇴 후가 더 무겁다. 대한민국 국민이 사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교회가 있기 마련인데, 그 교회의 지도자가 은퇴할 즈음이면 얼마나 일들이 꼬이는지, 직접 당면하지 않으면 그 사정은 알 턱이 없다. 권력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들이닥치는 쓰나미는 그 교회의 존속마저 흔들고 치명타를 가한다.
한국교회 교역자들은 교회에 모든 생명을 걸고 온갖 정렬을 불태운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갖는 가치가 절대적이다. 교회가 갖는 중요성이 이렇게 크다보니 이에 따르는 부작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세계교회가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거의 승리주의에 취해서 온갖 죄악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개신교회들은 이러한 책임을 가톨릭교회에 넘겨버리는 경향이 있으나, 전혀 그럴 수 없다. 구 교회 없이는 오늘의 개신교회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의 지나온 역사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는, 우리의 사전에는 그런 역사가 없다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교회’하면 그가 지나온 발자취가, 그가 누구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란, 개혁 이전의 히스토리가 어둠의 과정이었음을 시사한다.
지난해에 은퇴하는 어느 교역자가, 은퇴를 하는 자리에서 그가 섬겨온 교회의 중요성과 가치를 변증하는데, 얼마나 신도들이 공감을 갖던지, 모든 신도들이 경청하는 것이었다. 성전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이며,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운행하시는 몸이기 때문에 더욱 그리할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이기에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으로 다들 인식할 것이리라.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를 위해서 그의 생명을 바치시지 않았던가? 진실로 교회만큼 이 지상에서 고귀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이렇게 교회가 중요한 것은 동감하지만, 이러한 가치관으로 인해서 혹시 잘못되어지는 것은 없을까? 교회라는 것이 너무나 거룩하고 위엄이 있어서 국가마저도 멀리서만 바라보고 접근을 하려고 시도하질 않는다. 오랜 역사 과정에서 교회의 위치가 이렇다 보니, 교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스스로가 정화시키고 스스로가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는 부담을 크게 갖는다. 거대한 항공모함이 기지를 떠나면, 귀항하기 까지는 지도자의 권한 아래에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항공모함 안에서의 질서와 규율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교회의 위치와 가치를 말한다면, 누구에게든지 소중하게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되나, 교회의 가치가 그리스도보다는 앞설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죽음을 당하시고는 부활하시질 못하여서 아직도 지하에 계신다면 뭐라 말하기가 마땅할 것이 없겠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일어나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신 이상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가치를 갖고 있다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앞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나온 역사에서 이천년간, 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 보다 앞서 있었다.
교회의 이러한 횡포는 지나간 가톨릭의 역사에서 확연하게 나타나 있질 않던가? 마치, 그리스도가 부재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위임한 권세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휘둘렀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성경을 스스로 읽고 성령의 조명을 받기 이전에는 이러한 비리와 오류를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다. 과거의 성경은 어떠한 사정이 있었는가? 성경이 교권과 국가 권력의 압제를 받고 있었기에, 나라마다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할 수 없었다. 성경을 번역하거나 보급하는 자는 죽음을 각오하였던 것이다.
더더욱 글을 알고 읽고 쓰는 것 마저 기득권에게 점유되다 보니, 성경을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문자가 모든 백성에게 학습되어 지기 까지는, 1500년간 성경은 무덤에 묻혀있었던 것이다. 극소수의 위대한 설교자들마저, 그들의 권력자와 기득권자들에게서 자유하질 못하였기 때문에, 그가 황금의 입을 가졌거나 제아무리 재주를 피운다 한들, 마치 당나귀를 타고 가는 발람 같은 꼴이었다. 발람은 제가 가려는 길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당나귀를, 막대기로 세 번씩이나 후려갈겼지만, 그는 주의 사자가 칼을 들고, 그를 치려고 서신 것을 알아차리질 못하였다. 당나귀는 보고, 듣고, 알고 있었으나, 발람의 눈과 귀는 욕심으로 인해 어두워진 때문이었다. 자신의 영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농락하는 이들이 어디 그 시절뿐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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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지금 막 뛰어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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