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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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얗고 높은 캡, 길고 홀쭉한 가운, 그리고 어깨 위에 은빛으로 빛나는 계급장. 이것이 아내가 나에게 준 첫인상이었습니다. 아내는 한때 A본부 의무실에서 간호 장교였습니다. 언젠가 아내가 자신이 근무하는 곳에서 아내의 손바닥보다 훨씬 큰 권총을 보여 주었을 때, 나는 솔직히 바짝 쫄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사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을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못 간 나는, 나의 몸 어딘가에 빈 곳이 있는 것 같아 여성 앞에서 당당하게 굴 수가 없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 나의 앞에 그 이름도 당당한 간호 장교라니. 직장 동료들은 내가 간호 장교를 사귄다고 했더니, “에이,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이 …”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런 내 심정을 알았는지, 아내는 언젠가 나의 직장 현관 앞에 운전병이 모는 포니2를 타고 와서는 혼인 신고 서류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얀 면사포를 쓴 아내와 데이트를 할 수 있었지요.
아내와의 데이트는 주로 돈암동에 있는 T제과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제과점 안에는 빵을 사러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유독 많은 데 비하여, 우리처럼 데이트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요.
아내가 간호 장교이니 만큼, 나 역시 아내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카알라일의 『영웅 숭배론』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오지요. 시인으로서의 영웅, 과학자로서의 영웅, 제왕으로서의 영웅이 많이 나와야 그 나라는 밝아진다. 난 장차  영웅들이 될 인물들을 가르치고 있지요.”
“책을 많이 읽으시나 봐요?”
“예. 나름대로 가치 있는 시간 채우기라고나 할까요?”
대충 이런 대화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고리타분한 얘기를 당시에는 꽤나 진지하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아내가 물었습니다.
“집이 어디지요?”
“예. 정릉이요. 김지미가 저희 동네 산다고 들었습니다만…”
당시 영화 배우 김지미가 정릉에 산 것은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달동네인 우리 집과는 상당히 떨어진 고급 주택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집은 대지가 73평밖에 안 되어 좁아요.”
사실 우리집은 한때 시유지였던 땅이어서 우리 땅에 주변의 판잣집들이 차고 들어와 있어서 실제 땅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등기상으로는 엄연히 73평으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때 내 말을 100 내지 200평에 비하여 73평이 좁다는 뜻으로 알아 들은 모양입니다. 결혼 후 우리집을 와서 보고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으니까요.
아무튼 결혼해서 신혼 생활을 하는데, 이게 장난이 아닌 겁니다. 퇴근해서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벽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아내는 부엌일을 하다가 쏜살같이 들어와 말하는 겁니다.
“그런 TV 볼 시간에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 봐요.”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내의 닥달이 심해졌습니다.
“당신, 너무  TV에 빠져 있는 거 아니예요?”
사실 나는 뉴스에 관심이 많아서 채널을 돌려가며 뉴스를 보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총각 시절에 비하여 텔레비전 시청 시간을 많이 줄였는데도, 아내의 성화가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대뜸 이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긴 군대가 아니야?”
그러자 아내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더니, 한참 있다가 그 말이 맞는 지 픽 웃었습니다. 사실 아내는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지시하는 일이 많아서인지, 한때 집에서 잔소리를 많이 한 편이었습니다. 가만 있지 말고 청소 좀 해라, 빨래 좀 널어 달라 등으로 말입니다. 그 후로도 “여긴 군대가 아니야.”를 십여 차례 더한 후 아내의 잔소리가 줄어 든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아내도 실수를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였습니다. 그 실수란 다름이 아니라, 아내가 병실을 순회할 때였습니다. 한 번은 병실을 순회하는데 환자들이 계속 킥킥 웃어대더라는 겁니다. 그러자 한 사병이 한 사병이 “장교님. 거울 좀 보세요.”라면서 픽 웃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무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랬다나요. 사무실에서 그만 급하게 화장을 하느라고 글쎄 눈썹을 반만 그리고 병실에 나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거 봐. 사람이 실수도 좀 하고 그래야, 사는 재미가 있는 거예요.”
그 후로 우리는 부부로 살아오면서 몇 번의 실수도 있었지만, 아내가 간호 장교였던 탓에 내게 습관이 배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알뜰히 사용한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직업이 가져다 주는 생활 습관이 있는 모양입니다. 한때 간호 장교였던 아내가 나에게 매겨 준 습관은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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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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