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1.jpg
 평북 의주군 출신
김영훈(金英勳, 1878~1939)목사는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月華面) 호암동(虎岩洞)에서 당시 의주부사(義洲府使)의 장남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의주지방은 일찌기 기독교가 들어와 개화된 청년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벼슬을 역임하고 있던 사대부 양반집에서 태어난 영훈으로서는 기독교에로 개종 내지 신자가 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김영훈은 자신이 1886년부터 1904년까지 한문을 배우며 작서(作書)하는 법을 사숙을 통해 익힌 터였고 스스로도 자기의 장기(長技)는 한문(漢文)과 시문(時文), 사자(寫字)라고 할 정도로 한학(漢學)에는 능했고 주위의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 및 입신(入信)하게 된 환경은 자신도 모르게 조성되어 가고 있었다. 김영훈의 절친한 친구들인 한석진 김진근 양전백 등이 이미 평양주재 선교사 마포삼열(Rev. Samuel S. Moffett)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하여 착실한 기독청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들 친구들로부터 기독교로 귀의할 형편이 형성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듯 결단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의주부사로 있었던 부친에게 양반으로서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차제에 영훈에게 뜻하지 않던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마팻 선교사의 ‘신학반’에 있던 친구들에 의해 개종
마포삼열 선교사가 1892년 자신의 집에 의주의 젊은 청년들을 불러 모아놓고 처음으로 신학반(神學班, Bible Class)을 개설하고 있었는데, 양전백과 한석진이 여기에 참가해 기독교 진리를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김관근이 함께 참여하게 되자 제법 신학반은 활기를 띄어가고 있었다. 김관근은 이들보다 조금늦게 참여했지만 이미 그의 부친 김유현은 만주 봉천(封天)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던 백홍준에게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 일로 김유현은 백홍준의 사위가 되었으며, 김유현의 아들 김관근은 김영훈을 개종시키는 일에 성공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를 가르쳐 여호와이레 혹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붙잡혔다고 해야 할 것이다(제주와 산동선교이야기, 민경운, 게노시스 2015. p.196-198).
김관근은 부친의 개종과 함께 기독교 가정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서 당시 평양에 설립된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의 긴 기간 신학수업(神學修業)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
김영훈과 김관근은 같은 마을 이웃에서 자란 죽마고우였다. 김관근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개종사건을 이야기 하자 여기에 마음이 감동된 김영훈은 친구 김관근의 인도로 크리스챤이 된 것이다.
김영훈은 후에 의주지방에서 사경회(査經會)가 개최될 때마다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석하였으며 스스로 제자화 훈련을 받은 것이다. 그런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팻(S. Moffett)이 그냥 놔 둘리가 없었던 것이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영훈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마다 앞으로 조선교회의 큰 일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그를 자신의 선교구역의 조사(助師, Helper)로 정식 파송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목사안수
마팻은 그를 조사로만 놓아두지 않고 1908년 3월에는 자신이 세운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시키게 된다. 김영훈은 장로회신학교에서 선교사들의 복음적이고도 수준 높은 강의에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살기좋은 자신의 나라를 포기하고 미개한 조선땅에까지 와서 젊음을 불사르고 있는 일에 너무나 감동하였고, 자신도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되면 한국보다 더 어려운 지역에 가서 선교사로서 활동해야겠다고 몇번이고 다짐하였다.
드디어 1913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제6회 졸업생이 되었고, 그해 9월에 의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총회 창립기념으로 해외지역인 중국 산동성에 박태로, 사병순 목사와 함께 최초의 해외 선교사 파송을 받았다(총회를 섬긴사람들, 김수진,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74~75 참고).
김영훈 목사는 평북노회 소속이다. 평북노회는 1912년 2월 15일에 창립된 노회이다. 김영훈은 1913년 2월 19일에 모인 제3회 평북노회에서 방효원(方孝元) 등과 함께 신학생 취교자(就校者) 명단 속에 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신학수업 계속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김영훈은 그렇게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중에 해(該)노회에서 호암교회(虎岩敎會) 장로 안수자로 허락을 받는다. 같은 해인 1913년 8월 26일에 회집된 제4회 평북노회에서 김영훈은 총회 명령에 의하여 중화민국(中華民國) 선교사로 임명된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평북노회는 김영훈을 총회명령에 의하여 중화민국 선교사로 임명한다는 표현이다.

중국 산동성 총회 파송 선교사
총회는 실제로 총회전도국(總會傳道局)을 의미하는 것이다. 총회 전도국의 명(命)은 곧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명령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시각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총회 산하의 각 부서가 추진하거나 파송하는 것은 곧 총회가 행하는 것이다.
1918년 상해 광학서국(廣學書局)에서 발행한 중화기독교회연감(中華基督敎會年監)을 보면 당시 조선교회가 중국 산동지역에 선교한 일에 대하여 몇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첫째 한국교회가 1912년에 전도부를 조직하여 중국선교를 시작했다는 사실, 둘째 그 선교 경비를 전국교회의 매년 감사절 헌금으로 충당했다고 하는 사실, 셋째 선교하는 일을 중국 화북대회(華北大會)와 협의해서 래양지역(萊陽地域)을 허락받고 선교를 시작한 사실, 넷째 그렇게 해서 1913년에 김영훈, 박태로, 사병순을 파견하여 전도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고 초기 조선해외선교의 상황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적고 있다.
초기 파송선교사들이 현지어인 중국어를 잘 못했음에도 어릴 때부터 한문사숙에서 배운 한자를 주고 받을 때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은 현재의 시각으로 보아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1917년 귀국 후에 의산노회에서 성역을 감당하다가 3.1운동의 민족대표로 가담했던 유여대를 도우며 의주지방 3.1운동에 가담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하였다.

토마스 선교사 순교기념사업회 조직
이미 그의 이름이 총회적으로 알려진 관계로 1927년 9월 9일~15일까지 원산 광석동교회에서 모인 제16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명예로운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을 위한 마지막 봉사를 하게 된다.
그의 재임시 의결되었던 총회 결의안들을 살펴보면, ① 총대 1인이 두 가지 이상 겸직하는 것을 금하기로 하다. ② 최초선교사 토마스 선교사를 기리는 토마스목사 순교기념사업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③ 금강산에 교역자 수양관 건립을 허락함과 동시에 3만원 모금도 하기로 하다. ④ 교역자와 신자들을 위해 성경사전을 발행하기로 하다. ⑤ 예루살렘에서 모이는 국제선교대회에 참여하기도 하다. ⑥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조직하는 것을 허락하다. ⑦ 목사만 있고 장로(당회원)가 없으면 당회는 폐지하기로 하다.
김영훈 목사는 그렇게 조국 광복을 원하고 보기를 원했으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9년 61세의 연수를 다하고 하나님의 품에 영민했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42. 제16회 총회장 김영훈(金英勳)목사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