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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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세례가 교회에 들어온 것은 6세기경이다. 교회사가들은 그 이전의 교회역사에서 유아세례의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로인하여 중세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 운동’이 생겨났다. 재세례파 운동이란 종교개혁 세력 간에 많은 논쟁과 희생이 따랐던 사건이다.  ‘재세례’(再洗禮, anabaptism)란 가톨릭교회의 관례에 따라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인이 된 후 자신의 신앙고백에 따라 다시 세례(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는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속키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에게 베푸는 것이어서 “믿는 자의 세례”라는 것이 재세례파의 주장이다.
◇다음은 종교개혁 당시 유아세례에 대한 재세례파의 주장과 루터의 반박이다. ① 재세례파: “유아세례는 적그리스도인 교황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루터:  재세례파는 자신들의 주장으로 개혁 진영의 세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도 속이는 것이다. ② 재세례파: “유아들은 자신들이 받는 세례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며, 후에 부모나 후견인에게 그 의미를 배울 뿐이다.” 루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들려주는 말이 아니고는 우리의 출생과 그 밖의 많은 것도 아는 것이 없다. ③ 재세례파: “유아들은 믿음을 발휘할 수 없다.” 루터: 그리스도는 천국이 어린아이들에게 적합하다(마 19;14)고 했고, 세례 요한은 모태에서 믿었다(눅 1:14). ④ 재세례파: “성경에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없다.”  루터: 그러나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라는 주님의 대사명(마 28:19)에는 유아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가톨릭교회의 유아세례의 전통을 유지했고, 재세례를 이단으로 간주했다. 세례는 일생에서  한번 받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세례의 방식이 쟁점이 아니었다. 루터는 침례를 선호했고, 칼빈은 세례의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제는 농민전쟁과 뮌스터 사건을 거치면서 재세례파의 급진적 개혁운동이 종교개혁 진영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특히 후프마이어를 비롯한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빙자하여 교회를 분열시킨다고 본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교회가 ‘유아세례’를 하면 어떻고,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인세례’만을 주장하면 어떻다는 것인가 하겠지만, 당시로서는 재세례파 운동은 종교개혁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재세례파는 로마 가톨릭과 개혁세력 진영 양쪽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그들은 자발적 원리의 옹호자들이었으며, 신앙의 자유를 위해 죽어간 순교자들이었다. 현대사회의 정교분리 원칙과 종교의 자유는 그들의 희생에 바탕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그런데 아직도 ‘세례’와 ‘침례’를 가지고 논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리석은 짓이다. 특히 침례파가 성인세례를 받은 사람에거 다시 침례를 받으라고 하는 것은 이단적인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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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세례파 유아세례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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