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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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선산 출신
최재화(崔載華, 1892.12.18~1962.9.17) 목사는 경상북도 선산군 해평면 산양리에서 부 최도원(崔道源), 모 우서원(禹誓原) 사이에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재화가 태어난 1892년은 구한말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 속에 외국의 압력에 의한 문호개방이 실시되고 있던 때였다. 일본을 비롯, 세계 열강들이 이 나라 조정에 자기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최재화의 조상은 선산(善山) 해평(海平)에서 8대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한 줄기의 거대한 뿌리를 형성한 문중이었다. 이 지역에서 근 300여년을 살아왔기에 그 고을의 흥망이 최씨 가문과 직결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최재화의 70평생은 한 마디로 민족과 교회라는 명제를 제외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재화가 살았던 선산에는 유교와 불교가 성했던 지역이라 유림에서 세운 여러 향교(鄕校)가 있었고, 서당이 있어 어린이들의 교육기관 역할을 하며 명맥을 유지해 내려오고 있었다.
최재화는 부모의 농사일을 열심히 도우면서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천자문을 비롯, 논어(論語), 맹자(孟子), 동몽선습에 이르기까지 수준급의 한학을 배웠다.  맏아들의 낭낭한 목소리로 글읽는 모습에 부모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였다.

선교사 부해리의 선산 선교로 복음 받아
어둠의 그늘 아래에서 잠자고 있던 이 땅에 기독교의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재화가 살고 있던 선산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기는 1901년 고아면 괴평동에 미국인 선교사 부해리(Rev. Henry Munro Bruen, 傅海利)가 장로교회를 세우고 전도하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다. 1904년에는 선산읍교회가 설립되었고, 후에는 방혜법(Rev. Herbert E. Blarr 方慧法) 선교사가 뒤를 이어 군내 각지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부해리 선교사는 1874년 10월 24일 미국 동부지방 뉴지지에서 태어나 프린스턴(Princetan) 대학교와 뉴욕에 있는 유니온(Union) 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헌신하여 1899년 9월 29일 조선에 도착, 1899년 10월 26일 대구를 사역지로 하여 선교를 시작하였고, 1941년 9월 14일 선교지를 떠나기까지 만 40년간 대구지역의 토박이 선교사의 삶을 살다 간 충선된 주의 종이었다(최근 그의 선교일지 40yers Korea가 대구 남산교회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전 5권으로 번역간행되었다. 필자주)
부해리는 대구지역 김천, 선산, 고령, 상주 등을 순회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린 대구 경북지방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선교사였는데, 그가 전한 선산 땅에서 최재화가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는 터전이 된 것이다. 청년 최재화는 기독교의 복음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보았고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최재화가 복음을 받아들였 때는 이미 경북일대에 선교사들과 조사들이 헌신적인 노력으로 여러 곳에 교회가 설립이 되고 날마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시골 청년의 눈에는 기독교란 종교가 바로 경이의 대상이었다. 지금까지 유교와 불교라는 전통문화에 젖어있던 재화에게는 자신을 깨트리고 새 세상에 나온 병아리 이상의 신비로운 영적세계를 깨달았고 보았던 것이다.

서울 경신학교 진학
고향 선산에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접하게 된 최재화의 마음에는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찼다. 부해리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새로운 세계로 향해 눈을 뜨게된 재화는 배움의 기회가 오기만을 고대하였다.
이때 베어드(Rev. William M.Baird) 선교사에 이어 대구에 온 안의와(Rev James Edward, Adams 安義窩) 선교사를 만나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본 최재화는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출하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이때 안의와 선교사가 먼저 신학문을 배우는게 어떻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재화의 아버지를 설득, 재화를 서울 경신학교(敬新學校)로 보냈다. 최재화는 기독교에 귀의한지 2년만에 안이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의 주선으로 이렇게 서울로 와서 연동교회를 보고있던 게일(Rev. James Gale) 선교사의 사택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을 마치고 1914년에 졸업하였다.
최재화는 경신학교에 다니면서 크게 감화 받은 두 분의 스승이 있었다. 한 사람은 김규식(金奎植)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체육을 가르친 김창환(金昌煥) 선생이었다. 이들에게 배운 것은 단순히 학문전승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는 폭포요 절규였다. 우리가 이 나라를 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다.
졸업 후엔 잠시 진주초등학교 교사로 1년여 봉직한 적도 있었다. 1916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일본대학 법학과에 진학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귀국해 모교인 경신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중 경신학당 동창생인 이갑성(李甲成)을 만나 경신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대구·경북지방 3.1독립만세운동 주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용상과 함께 대구 경북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의 책임을 지고 대구로 귀향, 대구읍교회(오늘의 대구제일교회) 이만집(李滿集) 목사와 김태련(金泰煉) 조사를 만나 대구만세운동을 계획, 3월 8일 대구서문장날 계성·신명·대구고보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로 인해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조사는 현장에서 일경(日警)에 체포 구금되었고, 최재화는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고향 선산으로 올라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4월 3일 해평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지역에서 5월까지 계속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의 감시로 그곳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 일경의 눈을 피해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로 갔다. 그때가 1919년 6월이었다. 그는 학생모집을 위하여 수시로 국내에 잠입활동을 하다가 경북 상주에서 일경에 체포 구금을 당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감시의 허점을 틈타 탈출에 성공한 그는 중국 상해로 가서 경신학교 은사였던 김규식 박사를 만나 항일 무력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해 본격적인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김규식의 천거로 의열단에 가입
최재화는 상해에서 여운형 안창호 등의 다른 지도자들도 만나게 되었다.
최재화는 외교나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는 한계가 있고 궁극적으로는 회의를 가졌다. 독립이란 힘으로만 가능하며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의 무력을 통해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 가운데는 외교활동을 통해 조선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에 대하여 최재화는 탁상공론이라고 단정하였다.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무력 외에는 일본을 이길 길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의열단은 김원봉(金元鳳) 양건호(梁建浩)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비밀결사로서 일본 관리의 암살과 관청 파괴를 목적으로 한 무력적 항일항쟁 단체였다.
최재화는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갔다. 거기 머물면서 북경을 근거지로, 미밀단원이었던 김원봉과도 가까이 지내며 의열단 활동을 했다. 1919년 겨울에는 북경에서 의열단의 핵심 멤버가 되었고 의열단의 계획 실천한 일들은 조선총독부 습격사건, 밀양경찰서 습격사건, 일본 이중교(二重橋) 폭탄사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들이 있다. 이들은 단원들을 모집 훈련시켜 국내로 잠입시켜 활동하게 하였다.

화북신학교 졸업 목사안수
그후 최재화는 의열단과 결별하고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중국 화북신학교(華北神學校)로 진학하였다. 1926년 졸업하고 화복노회(華北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산동성의 다의강교회(多義講敎會)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후 1928년 길림성 흥원진교회(興源鎭敎會)에서 시무하다가 1931년 10년만에 귀국하여 고향이나 다름없는 대구제일교회로 부임해 당시 선교사 측과 갈등을 일으킨 소위 자치파(自治派) 문제를 지혜롭게 깨끗하게 정리하고 1942년 부산진교회(釜山鎭敎會) 청빙을 받고 목회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반일활동의 전력이 문제가 되어 일경의 감시가 계속되자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자 마자 임지를 대구 서남교회(西南敎會)로 옮겨 사역하던 중 그간의 그의 독립운동과 교회 사역의 활동을 인정받아 1949년 4월 서울 새문안(新門內) 교회에서 모인 제35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총회장으로 재직했던 35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연합으로 합동찬송가를 발행하기로 하고 거기서 나오는 이익금을 장·감·성이 7:2:1의 비율로 나누기로 하다. ② 그동안 사용했던 조선예수교장로회를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꾸어 부르기로 하다. ③ 노회분립을 허락하기로 하다(황남노회와 김제노회). ④ 장로회신학교를 총회직영신학교로 변경하기로 하다. ⑤ 총회 기관지 ‘부흥’을 발행하기로 하다.
최재화 목사는 총회장 임기를 승리롭게 마치고 1954년 대구장로회신학교(현재 영남신학대학교와 대신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고 이사장과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어 1955년 안의와 선교사와 신태식 장로, 김광수 목사와 함께 계명기독대학(현재 계명대학교와 계명문화대학의 전신)을 설립, 지방의 인재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9년 예장이 분열할 당시엔 예장 합동측에 남았고, 은퇴 후에는 낙향해 있다가 1962년 9월 17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 1980년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백은 최재화 목사, 김남식 2003 베다니 재판 서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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