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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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기적으로 성찬을 베풀려고 오는 사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집주인은 그에 관한 나쁜 비행을 듣고 격분하여,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이 나의 심판을 빼앗아갔구나.” 그리고 황홀경에 잠겨 황금 우물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황금 두레박이 있으나 나병 환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맛있는 우물물을 마실까를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왜 우물물을 마시지 않는가. 물을 긷는 자가 누구면 어때? 그의 직책은 다만 두레박에 물을 채워 항아리에 붓는 일이 아닌가.”
이러한 환상을 체험하고 그는 돌려보낸 사제에게 사죄하고 다시 성찬을 거행하여 주도록 간구하였습니다. 복음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된 선물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사랑의 편지를 반석 위에 올려 놓고 너와 나의 소통을 기다리지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죄인이었던 내가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으니 의인으로 칭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함께 하여 주십니다. 믿음으로 사탄을 이길 힘을 주시고, 의인으로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행복합니다. 나의 삶이 꽃보다 아름다워질 거라고 믿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영감을 내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1975년 봄, 나는 ‘대학 신입생 장기 자랑’에서 마당극 ‘춘향전’의 변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 때는 바야흐로 춘삼월. 여기 대한민국을 행복으로 이끌 남녀 청춘들이 모였으니, 얘 방자야. 풍악을 울려라.”
할아버지가 물려 준 한복을 차려 입고 구성진 목소리로 장내를 웃긴 덕에 상도 받았습니다. 그 후로 친구들은 나에게 회식 때마다 변사 역할을 하라 하였고, 나의 변사 역할은 참석자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았습니다. 이에 힘입어 163가지의 상황에 따른 표정을 노트에 적어 놓고 연습하여 TBC 연기자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2차 면접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그만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예술적 끼를 발산시키는 일이라면 어디든지 찾아다녔습니다. 그때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예술적 끼가 있다고 칭찬하여 주던 어른들의 칭찬을 잊지 않았습니다. S예대에서는 방학중에 교사들에게 무용 강습의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나는 기꺼히 거기에 신청서를 넣었습니다. 청일점인 상황에서도 나는 열심히 무용을 배웠습니다. 현대 무용을 비롯하여 고전 무용과 탈춤, 에어로빅 댄스까지 배워야 하는 빡빡한 일정을 나는 거뜬히 소화해 내었고, 고전 무용 교수로부터는 당신의 제자가 되라는 제의도 받았습니다. 나아가 나의 예술적 끼는 문학에서 제대로 발휘되어 박사학위를 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나는 어린 시절부터 광대 기질이 있었습니다. 유치원 시절에는 조숙하여 ‘성탄의 밤’을 준비하다가 옆에 앉은 여자 아이의 볼에 갑자기 뽀뽀를 하여 주변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고, 총각 시절에는 맞선 상대를 만나 음식점이나 다방에서 나올 때마다 빳빳한 만 원 짜리 지폐가 수십 장 들어 있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계산하면서 상대에게 여유 있는 척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은 처갓집에 신선한 과일을 잔뜩 싣고 가다가 차에 펑크가 나서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서 가족들 앞에 자신감을 보이며 타이어를 갈아끼웠는데, 펑크난 타이어를 다시 끼우는 바람에 가족들에게 망신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둘째, 나는 우둔하였습니다. 내가 포천군 일동면에 살 때의 일입니다. 초등 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매일 한두 시간씩 늦게 오길래 아내와 함께 담임 선생님께 사정을 알아 보러 갔습니다. 그랬더니 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모든 과목에서 이해가 느려 한두 시간씩 수학과 음악 숙제를 하게 하고 하교시킨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글씨도 삐뚤빼뚤하게 써서 가정에서의 교육이 절실하다는 말까지 곁들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초등학교 1학년 때 글씨를 그렇게 썼다고 하였더니, 담임 선생님은 무릎을 탁 치면서 그럼 아들도 가능성이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얘긴가 했더니 아빠가 초등학교 때 그랬으면 아들도 나중에 아빠처럼 박사학위를 딸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나는 나의 우둔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총각 시절, 내가 우둔함을 안 까닭에 결혼은 시력이 좋고 영리한 여성과 결혼하여 영리한 2세를 낳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H여고에서 전교 1등을 하였다는 아내와 결혼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아들의 유전적 요인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아들은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취직을 못해 친구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서도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일날이면 성가대석에서 주님이 기뻐하실 표정을 짓고 열심히 찬양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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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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