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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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안악 출신
장홍범(張弘範 1878.2.23~1950.5.25) 목사는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1878년 2월 23일 태어났다. 젊은 시기에 친구의 권유로 당시 안악읍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에 입신하여 신자가 되었다. 이때가 1908년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1909년에 안악읍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이수하고 안악읍교회(安岳邑敎會)에서 운영하던 안악보통소학교에서 1909년부터 1914년까지 교사로 봉직하였다. 이때 조선이 일본에게 병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울분을 참지 못해 가르치던 제자들에게 이 국권상실의 비참한 소식을 전하면서 함께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었고, 우리가 힘을 합쳐 조선독립을 쟁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일하였다.
장홍범은 1914년 3월에 안악보통소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1914년 12월 3일에 안악군 북율면 상거동 예배당에서 모인 제7회 황해노회에서 당시 함께 장로회신학교 학생으로써 계속 추천받은 후보생 18명 명단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 하권, 한국교회사학회 편 1968, 서울 p.146).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목사안수, 황해도 지역서 목회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9개월 간의 긴 방학을 맞이하게 되면 고향으로 돌아와 황해도 안악지방과 재경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소안론(Rev. William L Swallen) 목사와 이길함(Rev. Graham Lee) 선교사의 당회 구역의 순회조사(巡廻助師)로 활동하였다.
1918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하고 그해 9월 황해노회(黃海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안악군 용문면 동창교회(東倉敎會 1910 설립)에 부임해 첫번째로 공식 목회사역을 시작하였다.
그후 재령군 남율면 해창리에 있는 해창교회(海昌敎會, 1899. 3. 3 설립)와 모동교회에서 시무하였는데, 1921년 모동교회 재직시에 황해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어린이부흥회 강사로 활동
그는 특히 아동교육에 관심도 많았고 소질도 다분히 갖추고 있어 1924년부터는 전국 여러 지역 노회와 연합회로부터 어린이부흥회 강사로 요청을 받아 주일학교 부흥사역에 일익을 감당하기도 했다.
그는 동요도 잘 부르고 동화도 잘해 전국을 다니며 어린이전도와 부흥에 큰 기여를 하였고, 이러한 그의 활동이 전국주일학교연합회(全國主日學校聯合會)를 창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전국주일학교연합회를 조직하는데 발기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위원회를 조직하고 드디어 1924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의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어 임기 2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조선교회 어린이교육과 영적성장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25년에는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북리에 있는 사리원 동부교회(1922. 1. 1 설립)에서 목회하던 중 황해노회 종교교육부(宗敎敎育部) 총무로 발탁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도 다른 노회들에 비해 종교교육, 특히 아동교육이 가장 활성화된 곳이 바로 황해노회였기 때문이었다.

종교교육부 부장 선임
장 목사는 보통소학교 교사로 봉직했던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고 큰 자산이기도 하였는데, 본인에게 가르치는 소양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1925년 제2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회장, 1932년 9월 9일 평양창동교회에서 모인 제21회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에서 종교교육부 부장으로 선임이 되기에 이른다. 그로인해 그는 이듬해 1933년 9월 평안북도 선천남부교회(宣川南部敎會)에서 모인 제2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이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총회는 목사회원 73명, 장로회원 73명(미참 2명) 선교사 회원 34명이었다. 제22회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남궁혁 목사는 신약 성경 사도행전 20장 17절~34절 본문으로 위기에 당면한 조선교회와 진정한 부흥운동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새로 선출된 총회장 장홍범 목사가 회장으로 회의를 진행할 때, 각부에서 상정된 헌의안들이 기각되는 일이 많았다. 예를들면 세례교인 1500명당 목사 장로 총대를 각 1인씩 파송하자는 안이 부결된 것이라든지, 특별히 함남노회(咸南老會)에서 상정한 여성장로 안수 허락의 건이 정치부에서 부결되었다. 이 안건은 함남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 노회에 올린 것인데 총회에서 부결됨으로 결국 교회 내에서 남성중심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만 것이 아쉬움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의 총회장이었던 장홍범 목사는 평생을 후회하였다는 말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황국주 등 이단 규정
제22회 총회 결의가 이러한 아쉬움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제22회 총회의 중요결의 안건 가운데는, ①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황국주 등을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② 중국 산동(山東)에서 실시하게 해달라는 산동대회 개최는 승인하기로 결의했다.  ③ 교단 최초의 면려회보를 창간하기로 가결하였다.
또 다른 총회에서의 기각된 안건 가운데에는 평안노회와 황해노회에서 공동으로 위임목사를 4년에 한번씩 시무투표로 하자는 안건이 상정되었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그 외에 제22회 총회의 업적을 몇가지 남겼는데, 당시 개교회에서 무곡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제22회 총회에 와서 비로서 곡조(曲調)찬송가를 발행 보급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2년 간의 작업 끝에 1935년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신편찬송가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행한 것이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100-101).

총회 종교교육부 감사로 성경통신교재 발간
장홍범 목사는 총회장을 역임한 후 사리원 동부교회를 시무하고 있던 중에 1937년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였던 정인과(鄭仁果) 목사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총회 종교교육부 간사로 일하게 되었다.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이긴 하였지만 목회현장을 떠난 장 목사에겐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 목사는 이어서 총회 출판부장의 일까지 맡아 주일학교 교재와 성경통신과 교재 발간사업까지 맡아 교단의 교회교육을 도맡아 하는 중요한 과업을 맡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재능과 역량을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위해 목회의 소명과 버금가는 헌신과 희생의 사명을 감당한 지도자로 기록된 총회장 출신의 교회교육의 실천자이기도 하다.

6.25때 행방불명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앞두고 일제당국의 형사에 의해 김선두, 강병주 목사 등과 함께 구금 당했던 일도 있었다. 출감  후에는 다시 총회 종교교육부의 일을 맡아 수고하다가 총회가 해산이 되자 경성(京城, 서울)을 떠나 고향 안악으로 귀향해 그곳에서 목회하던 중 1950년 6.25 동란으로 행방불명된 후 사망일자는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살다가 공산당에 의해 순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13권 한영제편, 1984 기독교문사 p.649-650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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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제22회 총회장 장홍범(張弘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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