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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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바둑을 시작한 것은 돌아가신 형 S가 생전에 즐기던 취미 활동이어서 그렇습니다. S는 W은행에 입사한 후 독일?미국?중국 등에서 외환 딜러 업무를 보다가 중국 칭따오에서 한중 합작인 K은행 행장까지 역임한 수재였습니다. 비교적 우둔한 편인 나로서는 귀감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S가 하는 취미 활동까지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일하던 칭따오에 내가 여행갔을 때에도, 그는 틈만 나면 스마트폰으로 바둑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후 나는 귀국하자마자 매일 인터넷에 들어가 한 시간씩 바둑을 두었습니다. 바둑 판세를 훑으며 상대가 두고 싶어하는 곳을 가려내 예상치 못한 곳에 착점하는 재미는 스릴마저 있었습니다. 더구나 수를 빨리 읽는 편인 내가 속도를 내어 착점하다 보면 상대로 내 페이스에 말려 착점 속도가 빨라져 승리를 따내곤 하였습니다. 내가 하루를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것도 오전에 바둑 두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어서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바둑을 두면서 세운 기세는 대인 관계에서나 협회 일을 볼 때에도 유용하게 작용하였습니다. 가령 선배가 여자 문제로 고민할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말해 주면 상대가 안정을 되찾기도 하고, 협회 일을 할 때 서로간에 갈등이 있을 때에도 원만한 일처리를 하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도 바둑에서 얻은 기세 덕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바둑의 기본은 자신의 집을 상대보다 넓히는 것입니다. 어릴 적 놀이 가운데 하나였던 땅뺏기도 이와 유사합니다. 커다란 사각형 선 안에서 작은 돌을 어느 방향으로 굴려야 자기 집을 확장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돌을 굴려야 하지요. 처음엔 욕심을 내지 않고 돌을 조금씩 튕겼다가 나중에 자기 땅이 넓어지면 마음껏 돌을 튕기게 되고, 끝에 가서 상대의 집 근처에 이르러서는 세밀하게 돌을 튕겨야 온전한 자기 집이 되는 거지요. 바둑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상대의 집이 넓다고 그곳에 끼어들었다가는 영락없이 자멸하는 경우가 많지요. 이를 막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고 차분히 넓은 안목으로 자기 집을 지어나가는 것입니다.
세상 이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남들이 부동산으로 돈 벌었다고 나도 무작정 뛰어들었다가는 실패하기 쉽지요.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달란트가 있습니다. 성직자는 감동을 주는 설교로 교세를 확장하고, 작가는 독자를 감동시키기 위하여 문장을 가다듬지요. 사람들이 다 자기 전문 분야가 있어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선교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세계의 오지에 직접 뛰어들어 선교하는 선교사가 있는 반면, 국내에서 선교 헌금과 기도와 편지로 지원하는 교인도 있고,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외국에 나아가 직업을 가지고 선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선교 사업 가운데서도 바둑의 이치가 유용할 때가 있습니다. 바둑에서 상대의 수를 간파해야 이길 수 있는 것과 같이, 선교 대상지의 실정 파악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몇 해 전 몽골에 비전 트립을 갔을 때의 이야깁니다. 그곳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교회를 세울 때에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허가 조건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봉급을 받는 집사를 적정 인원 두어야 하고, 세금 내는 것도 감사를 받아야 하며, 교회 통장을 따로 만들어 관리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 외에도 그곳의 인종적·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노화 현상이 빨리 오는 편이고, 가을에 낮과 밤의 온도차가 매우 큰 것도 지역적 특성 가운데 하나이지요. 또한 그곳 사람들은 어학적 두뇌가 발달하여 한국어를 매우 빠르게 익히는 편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선교하기 이해서는 아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한데, 시행 착오를 겪는 교회가 없지 않습니다. 국내에서 많은 선교 헌금을 보내 큰 교회를 지었다가, 겨울에 석탄 연료비를 감당 못하여 어린이 예배실에서 주일 예배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동네의 근거리에 서로 다른 교파가 교회를 따로 지어 한정된 주민을 대상으로 경쟁하듯 전도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는 선교 대상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무작정 돌진하는 데서 오는 시행착오일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스블론과 납달리와 같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지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와 병자가 많은 곳에 오셔서 그들에게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을 음식을 제공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었던 자를 다시 살리는 치유를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울 때에도 40년의 궁중 생활, 40년의 광야 생활, 40년의 지도자 생활을 하게 하였지요. 주님은 상대를 아는 바둑의 이치를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신자도 이웃과 함께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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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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