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3·1 만세운동 및 민족운동 신간회 참여
전북 전주지역에서 목회 활동
해방 후 ‘전북치안대책위원장’맡아 치안유지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취소
1951년 달성군 보궐선거 국회의원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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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달성 출생
배은희(裵恩希, 1888~1966.2.5) 목사는 1888년 구한말 경북 달성(撻城)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에는 마을에 있는 한문사숙(漢文私熟)에서 천자문과 논어 맹자를 익혔다. 17세 때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잠시 방랑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교회에 발을 드려놓게 되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로인해 자신이 살던 집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허락하였으며, 교회 안에 숭덕학교(崇德學校)를 세워 피폐했던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스스로 전도자, 학교장, 교사 등의 1인 3역을 감당하기도 했다.
그의 교역활동은 자기가 살고 있는 달성뿐 아니라 경산(慶山)과 멀리로는 청도(淸道)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담임하며 순회전도자로써 열심을 다하였다.
배은희가 처음 공식기록에 나타나기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에서 이다.
1912년(壬子) 全州郡 西文外敎會에서 牧師 金炳禮를 講聘하여 視務하게 하고, 其後 金仁全, 崔義德, 呂博師, 裵恩希가 相繼하였고, 助師는 崔祥燮, 李守鉉 等이 視務하니라(下券 p.171 참조)는 기록에 보이며 같은 책 전북 노회 기사 중 全州 西文外敎會에서 임시시무 하는 裵恩希를 該敎會에 정식 視務 허락하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史記 下券 p.281 참조).
한편 배은희는 1920년 평양 장로교회신학교를 조선교회 영남지방에서 특출한 목회활동을 펼쳤던 기라성같은 김병호, 박덕일, 박문찬, 박명석, 염봉남 등과 함께 제13회로 졸업하고, 그들과 함께 조선교회를 이끌어 가는 기둥이 되었다.
신학교 재학시절에도 1919년 3월 1일 3.1독립운동을 맞이하여 학생시위 운동에 앞장서 민족의 울분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이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3월 8일 대구만세시위에도 주도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이후 일제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자 일경의 눈을 피해 마산과 부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당시 경주지역 계남교회 시무시에 전주 서문밖교회(全州 西文外敎會)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던 인연으로 1921년 고향을 떠나 전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겨 목회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배 목사는 전주에서 목회하면서 1927년 경성(京城)에서 조직된 국내유일의 민족유일운동으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 전주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신간회 발족의 근본 목적은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굴레에 꼼짝 못하고 있는 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예속의 굴래를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일제 당국과의 어떠한 타협도 배제한다는 뚜렷한 목적으로 출발하였으나, 좌익과 우익과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 되어 조직된지 4년만에 해체되고만 민족운동이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13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p.662 참조).
교회 안에 유치원 설립과 무산아동들을 위한 야학을 설립해 민족의식과 자립자활의 의식을 깨우치는데 앞장섰다. 야학은 한때 학생수가 5,6백명에 달하기도 했다.
또 1932년과 1936년 두 차례나 전북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에 협소한 기억자(ㄱ)예배당을 헐고 연건평 240평에 이르는 새 예배당 건물을 지어 호남지역의 굴지의 교회로 자리 매김을 하기도 하였다.
1938년 조선교회에 신사참배 바람이 불어닥치자 더 이상 육영사업(育英事業)을 이어갈 수 없어 유치원은 이창환에게, 무산아 야학(夜學)은 박심근에게 이양하였다.
배은희 목사는 1929년부터 신현창(申鉉彰), 유상백(劉尙伯), 강봉의(姜鳳儀), 김병수(金炳洙) 등과 함께 <독신전도단>을 조직, 농촌교회부흥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대상지역은 전북 일대였다. 후에 전북노회측과 약간의 갈등이 생겨 독신전도단을 <복음전도단>으로 개편하여 재출발했으나 일제당국과 신사참배 문제로 또 갈등이 생겨 강제해산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이때 김가전, 최양서 등과 함께 잠시 투옥되었다.
1943년 일제 패망직전에 더 이상 교회에 머물며 정상적인 목회활동이 어렵게 되자 스스로 전주교회를 사임하고 의사인 장남 배보석의 집으로 거쳐를 옮겨 지내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배은희 목사의 몸이 지병으로 많이 상해 있었다. 그러나 아들 의사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건강을 회복하기에 이를 즈음,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되는 1945년 8.15를 맞게 되었다.
그는 해방과 함께 독립치안유지를 위한 <전북치안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혼란한 정국에 치안평정을 위한 일역을 감당하였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7권, 기독교문사 1982. p.342 참조).
한편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는 1943년 5월 7일 일제당국의 조선 종교정책에 의해 총회장 김응순 목사가 총회장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교단을 해산해야 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본 제국주의 시책에 협력했던 총회장 김응순 목사는 새로이 출발하는 일본 그리스도교단(日本基督敎敎團)에 모든 교권을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새로운 교단이 출범하자 박학다식한 채필근(蔡弼近) 목사가 초대통리(初代統理 교단장)로 선임되었다. 이 일로 인해 채필근 목사는 죽을 때까지 친일부역자(親日派)라는 낙인이 찍혀 불행한 여생을 보내야만 했다. 한 마디로 자업자득이었다.
다시 1945년 7월 7일 일본 기독교조선교단(日本 基督敎朝鮮敎團)을 창설하여 초대통리에 김관식(金觀植) 목사가 선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얼마 못가 일본이 전쟁에 패하자 일본기독교조선교단도 자연히 해체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도 일부 교권주의자(敎權主義者)들은 남부기독교회(南部基督敎會)를 재건한다면서 김관식 목사를 회장으로 재선임하였다.
그러나 감리교회 쪽에서 이탈해 나가 조선감리교회를 재건하였다. 처음에는 장로교회도 참여했지만 배은희 목사는 남부총회를 재건해야 한다면서 이미 전국에 조직되어 있던 교구(敎區)를 노회로 전면 개편하였다. 그런 후 1946년 광복 이듬해 6월 12일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에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2회 총회를 개최 총회장에 배은희 목사를 선출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려운 청소년기를 거치면서도 우연히 예수를 믿고 교회를 세우고 교육자가 되겠다고 평양 장로교회신학교까지 졸업하여 목사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교육자가 된 입지적인 인물로 교단내 인사들로부터 그의 신앙과 능력을 인정받아 해방 직후 혼란기에 처했던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로 세움받게 된 것이다(총회를 섬겨 온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140 ~141 참조).
1947년에는 임시정부를 반대했다 하여 괴한의 피습을 받기도 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반탁과 친탁으로 소란했던 해방정국이 혼란할 때 배은희 목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자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1948년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예수교장로회 총회 고시부장으로 피선되었으며, 1951년 경북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목사로써 해방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영광의 기회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에 국민부장을 거쳐 경남자유당 위원장을 맡아 국정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그 후 자유당을 탈당하였고, 1954년 5월 20일 민의원 선거시 대구갑구(甲區)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배은희 총회장이 재임했던 제32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38선이 철폐되면 남북이 통일한 총회를 조직키로 하되 현이남 12개 노회가 총회를 조직, 회의를 진행키로 하다. ② 1938년 제27회 총회시 가결한 신사참배는 전국교회의 신앙부족으로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저지른 잘못으로 알고 회개하고 이를 취소하다. ③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를 총회가 직영키로 하고 대학령에 의한 신학교로 하기로 하다(제98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총회사무국 편, 대한예수교장로회교회 2013. p.17 참조).
남긴 저서로는 <나는 왜 싸웠나>가 있으며, 은퇴 후 자택에서 1966년 2월 5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운 모습으로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영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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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제32회 총회장 배은희(裵恩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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