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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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에 전기수라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청계천 광교 다리 밑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전기수가 이야기를 들려 주고, 청중으로부터 약간의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여 가는 직업 말이지요. 나도 그 전기수 역할을 해 보고 싶습니다. 오늘 택한 이야기는 발자크의 『사라진』(1830)(권택영의 『후기 구조주의 문학 이론』, 민음사, 1990 참조)입니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어느 날 밤, 란티 가문의 대저택 안에서는 파티가 열립니다. 밖으로 튀어나온 발코니의 창문턱에 걸터앉아 비단커튼 주름 뒤로 몸을 감추고 화자는 시끄러운 파티의 한가운데서 몽상에 빠집니다. 밖엔 죽음의 춤이 어른대는 어둡고 앙상한 정원이나, 안에는 파리 최고의 가문과 재산을 자랑하는 상류사회 사람들의 호화스런 파티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른쪽엔 춥고 음울한 영상과 왼쪽에는 호사한 삶의 영상이 공존하는 가운데, 화자는 한쪽 발은 추위에 떨고 다른 쪽은 열기에 젖어 있습니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무도회장에서, 사람들은 마담 란티 자녀의 교양과 미모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한편, 란티 가문의 근거와 재산에 대해 의문을 가집니다. 이때 딸 마리아니나가 지독히 늙고 추한 모습의 노인을 앞세우고 나타납니다. 파티장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불협화음을 몰고온 노인에 대해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집니다. 그런 가운데 화자는 자신의 파트너인 마담 로체피트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로체피트는 노인 옆에 대조적으로 놓여 있는 아름다운 아도니스의 초상화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이에 화자는 그 그림의 비밀을 로체피트에게 알려 줍니다. 그 초상화는 어느 여자의 조각을 본뜬 것인데 그 여자는 마담 란티의 친척이었습니다.  마리아니나는 노인을 뒷문으로 내보내자, 젊음과 미모로 화자를 애태운 마담 로체피트는 노인에 대한 비밀을 당장 알고 싶어하지만, 화자는 그 다음날 그녀의 방에서 단둘이 된 후에야 이야기를 꺼냅니다.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난 사라진은 공부를 많이 하여 훌륭한 법관이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에 걸맞지 않는 괴상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반항적이고 몽상적이었던 그는 언제나 복잡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는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성향이 야성적으로 폭발되는 충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부 시간에는 선생의 모습을 벽에 그려 놓기 일쑤였고, 예배 시간에는 괴상한 조각을 새기곤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방자한 그리스도상을 새긴 죄로 학교에서 추방됩니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재능과 폭발적 열정이 유명한 스승을 통해 갈고 닦여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유학 생활 중 조각만이 그의 전부였던 그가 로마의 어느 극장에서 쟘비넬라의 노래를 듣게 되는 것은 그의 운명에 커다란 전환점이 됩니다. 쟘비넬라의 미모는 조각가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이상이었고 그녀의 노래는 예술가의 열정에 기름을 붓는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얻든지, 아니면 죽으리라!’고 각오하고, 고통과 기쁨이 교차되는 감정으로 그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수없이 그려내며 조각으로 새깁니다. 매일 극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쟘비넬라의 모습과 노래에 도취되던 사라진의 열정에 호응한 듯, 잠비넬라는 그를 파티에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사라진의 구애를 거절하는 쟘비넬라의 말과 행동은 역설적으로 더욱 그를 자극합니다. 그녀를 납치할 계획을 세운 사라진에게는 로마 왕자가 그녀에 관한 사실을 귀띔하는 데도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여자 역할을 하도록 길러진 거세된 남자 배우였습니다. 납치한 쟘비넬라의 입에서 사라진은 처음의 만남이 그의 순진성을 놀려 주려 한 주위 사람들의 계획이었음을 알려 줍니다. 절망 속에서 그는 그녀의 동상을 쳤으나 실패했고 다시 그녀를 죽이려 할 때 후견인이 보낸 잠복자들에 의해 그는 살해됩니다. 사라진이 죽자 쟘비넬라의 후견인은 그녀의 동상을 가져다 대리석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란티 가문은 화가 비엔으로 하여금 그것을 다시 본떠서 아도니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대목은 화자가 창턱에 걸터앉아 파티장 밖의 차가움과 안의 열기를 동시에 감지한다는 사실과 함께, 쟘비넬라가 거세된 남자로서 태생은 남자이나 여자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마담 로체피트도 아도니스의 초상화에 대하여 처음에는 미적으로 바라보았다가 그 사연을 알고 나서 실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존재에는 상반된 감각과 태도와 감정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사물을 어느 한쪽으로만 바라보는 편협함을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볼 때 세상에는 분명 미와 추,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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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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