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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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천 고경 출신
손계웅(孫啓雄·1905. 10. 18~1998. 4. 21)목사는 1905년 10월 18일 경상북도 영천군 고경면 우천동 315번지 손세욱과 박계화 사이에 2남3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손계웅 소년은 1931년 영천지방을 순례하던 미 북장로회 소속 안두화(安斗華 Edward A. Adams 1895~1965. 9)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전해듣고 세례(洗禮)를 받아 기독교에 입신하였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아담스는 미국 캔사스 출신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지푸 내지선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마치고, 시카고에 있는 매코믹(Mcomic Theological Seminary)을 졸업한 후, 1921년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 해 처음엔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25년 대구선교부에 와서 1926년부터 1940년까지 대구동산성경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교육사업과 농어촌교회 등을 설립 하였으며, 1954년 2월엔 계명기독대학(현 계명대학교 전신)을 설립, 초대이사장으로 후엔 학장(1958. 9~1961. 9)으로 정년퇴임하고, 1963년 7월 귀국해 1965년 9월 오래곤(Oregon)주 로스버그에서 사망하였다.
손계웅은 1921년 2월 10일 진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2월 28일 대구고등성경학교(현 동산성서학원의 전신)을 졸업하고, 1943년 2월 10일 평양 장로회신학교 예과를 수료하고 내려왔다가 1947년 6월 5일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 현 서울신학대학교 전신)를 졸업하였다.
손계웅은 경선신학교를 다니면서 대구 신정교회(현 서문교회 전신) 조사(助師)로 시무하였다. 당시 교회 집사 한 분이 이런 기회에 적산(赤山)집이라도 한채 마련해 교회개척을 하라는 조언을 했으나 그 당시엔 별 생각이 없었으나 몇날이 지나면서 적당한 집을 마련해 주일학교를 하다가 교회를 설립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후 그런 건물을 물색하던 중 삼덕동(三德洞) 수성교 가까이에 유치원이나 교회로 사용할 만한 건물 하나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건물이 오늘의 대구 동부교회가 된 당시 천리교(天理敎)에 속한 경상교회(慶尙敎會) 건물이었다.
손계웅 조사는 이미 영천에서 농촌지방 전도사로 교역을 했던 경험과 동산병원에서 원목으로 목회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러한 교회개척의 꿈을 지닐 수 있었다.
당시 천리교 경산교회 책임자인 일본인 여성 정상승의(井上升衣)씨를 만났는데, 당시 돈으로 1만원이란 너무나 벅찬 금액을 요구해 손 전도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온 수 주일 후에 일본인 여 교주 정상씨로부터 연락이 와서 만났더니 “선생님께 이 건물을 맡길 터이니 일본으로 갈 여비(旅費)조로만 돈을 마련해 주십시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짐작컨데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한 후 재조선(在朝鮮) 일본인들이 귀국해야 할 처지라 오히려 다급해진 것이라 생각되었다.
손 전도사는 돌아와 자신의 소유인 당시 말총거리 덕산동에서는 약국을 하던 자신의 집을 처분하고 지니고 있던 돈을 모두 모아  1천원을 준비(당시 쌀 한말에 60전, 기와집 한채 600~700원)해 갔더니 그걸 받고서 경산교회 건물을 양도해 주었다.
천리교회당을 양도받은 1945년 10월 18일이 오늘의 대구동부교회(大邱東部敎會)가 첫 걸음을 내디딘 뜻깊은 날이 되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정상적인 교인은 별로 없었다. 당시 신정교회 교인들이 본 교회예배를 마치고 오후 2시에 동부교회로 와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신정교회 조사로 시무하고 있던 정분(情分) 때문에 오시던 분들이라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차츰 그 수가 줄어 들었다.
그 해(1945년) 겨울이 되자 김례석 장로 가족을 비롯 김옥화, 백남 집사, 김선이 권사 등이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고, 강대의씨, 박경련 집사, 함정애 권사가 나오고 몇개월 뒤에 김숙애, 장영근, 김병희, 김월희 씨 등이 출석하게 되어 교회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 동부교회는 8.15광복을 맞이해 귀국하는 분들이나 만주(滿洲)에 살다가 귀국한 해외 이주민들이 많았다.
한편 신정교회 교인들도 신정교회 낮예배를 마치고 동부교회로 출석하는 분들이 중심이었다. 1946년 12월 11일 손계웅 전도사가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동부교회 임시목사로 취임하였다. 같은 달 22일에 정두병, 권학윤 두 분이 장로로 장립하였으며, 손계웅 목사가 당회장이 되어 당회를 주관하게 된 것은 1949년 1월 17일 제4회 당회 때부터 정식으로 주관하기에 이르렀다.
제1회 당회는 1947년 3월 31일 당시 신정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정재순 목사가 인도하였으며, 결의 안건을 보면 출석 당회원 3명으로 서기에 권학윤 장로가 피선되었으며, 4월 10일 개최되는 경북노회 파송 총대로 정두병 장로가 결정되었고, 김복주 집사의 집사직 사면을 받기로 결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손계웅 목사를 동부교회 위임목사로 청빙하는 공동의회가 1948년 11월 28일(주일)에 열려 3분의 2가 넘는 절대 다수로 결의되어 이듬 해 1949년 7월 31일 위임되었다. 당시의 교세를 잠시 살펴보면 1946년도에는 제직이 남 5명, 여 5명이었고, 1959년에는 남 25명, 여 35명으로, 1960년도에는 남 25, 여 35명, 1967년도에는 남 40 여 80명으로, 1972년도엔 남 45, 여 95명의 제직이 선출되었다. 1976년도에는 남 45 여 115명으로 총제직수가 167명으로 주교 교사 60명과 중고등부 장년부까지 합하면 165명에 이르렀다. 1995년도에는 남 292 여 570명 합계 862명에 이르러 1946년도에 비하면  86배나 증가한 숫자이다.
이렇게 순탄하게 성장해 오던 동부교회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두 차례의 큰 홍역과도 같았던 교회의 분립도 있었다.
첫번째가 1953년 1월 3일 다섯 분의 장로와 여러 교인들이 동부교회를 떠나 성락교회(聖樂敎會)를 조직하고 따로 예배를 드린 사건이다. 이 성락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로 소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번째로 갈라나간 교회는 경북대병원 후문에 있는 수산교회(1965년 5월)이다. 처음 수산교회의 시작은 대봉동 수도산 부근에서 시작되어 수산교회(水山敎會)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수산교회 원로 조현식 목사 증언).
이 교회는 동부교회 소속교단인 예장합동에 소속되어 있다. 손계웅 목사는 사랑이 많은 목사로 지역에서 성자(聖者) 목사로 평가되고 있다.
교인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아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우리교인들은 내게 금싸라기라고 자주 이야기 했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이 있으면 슬그머니 남모르게 쌀을 갖다주고 오기도 하고 집에 사람이 없을때는 봉창으로 방에 밀어 놓았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번은 대심방 때 가난한 집사 댁에서 예배를 드리고 자기가 앉은 방석밑에 봉투 하나를 놓고 나왔는데 이 집사가 심방대원들을 배웅하고 들어와 방청소를 하다가 손목사가 앉았던 방석밑에서 돈 봉투를 발견하고 급히 쫓아와 목사님! 목사님이 앉으셨던 자리밑에 이 봉투가 나왔다고 가져왔다. 손목사는 내 것이 아니올씨다. 그것은 주님께서 집사님께 주신것인 것 같다며 호탕하게 웃으시며 가시더라는 이야기다. 동부교회의 한 원로 장로는 손 목사의 인간미와 목회 스타일에 대해 이럽게 말하고 있다.
목사님은 첫째 온순하다. 둘째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겸손하다. 셋째 교인들을 가족같이 사랑한다. 넷째 목사님이라기보다 친 아버지 같다. 다섯째 덕스럽다. 여섯째 원만한 분이시다. 일곱째 화를 잘 내지 않는다.
그의 목회스타일은 첫째 설교위주 보다 심방위주였다. 둘째 설교는 예화보다는 성경강해식이었다. 셋째 숭늉같은 설교였다. 넷째 순박한 농부 서민 스타일이었다. 손목사는 걸어서 심방을 주로 했는데 집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대문을 열고 아이들이 나오면 손목사 왔다 갔다 캐라 하고는 다음 교인집을 향해 가곤 하였다. 문자 그대로 앉는 심방이 아니라 선 심방이 위주였다. 어른이 있을 때는 이 집사 아무일 없제하고 나왔다.
당시엔 모두가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부담을 안주기 위해 오랫동안 붙들고 앉아 예배드릴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그는 키도 크고 인자하게 생겨 자애로운 아버지 모습이다. 한번은 심방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인데 대평로에서 어떤 여자가 “어디 갔다 오십니까?”라고 반갑게 인사를 하기에 교인인줄 알고 “집이 여기 있나”라고 했는데 “저희집에서 좀 쉬었다가 가세요”라며 손목을 잡고 이끌어 멋도 모르고 심방예배를 원하는가 해서 따라갔는데 가정집이 아니고 술집이었다고 한다. 손목사는 그 여인의 손을 뿌리치고 “내가 목사다”라고 외치고 뛰어 나왔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교인들을 더잘 가르치고 지도해야겠다는 염원을 안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되어 1957년 4월에 대구대학 철학과(현 영남대학교 전신)에 편입해 공부한 후 졸업하였다.
친히 개척해 목회 한 손목사는 1945년부터 1976년까지 만 31년 간의 성역을 마치고 원로목사로 추대받고 은퇴하였다. 그의 교정(敎政) 경력을 보면 1959년 경북 고등성경학교 교장으로,  1961년 대한장로회신학교 교수회 회장, 1962년에는 70회 경북노회장, 1963년 총신대학교 이사 및 대한장로회신학교 교장, 1964년 영남협의회 초대회장 및 1965년 영남협의회 2대 회장, 1966년 총회 영남대회 초대회장, 1967년 80회 경북노회장, 1967년 9월 예장총회 부회장, 1968년 9월 19일~24일 부산초량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인 총회장에 당선되어 예장총회를 은혜롭게 이끌었다.
그가 재임했던 예장 제53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보면 ① 서울 중구 회현동에 있는 총신 기숙사를 매각하고 새기숙사를 짓기로 하다. ② 대회 제도를 실시하기로 하되 5개 대회를 두기로 하다. 중부대회(경기, 강원), 충청대회(충청남북도), 호남대회(전라남북도), 영남대회(경상남북도), 서부대회(무지역노회 일원) ③ 예장통합측과 합동문제는 합동원칙과 세칙에 따라 합동할 것으로 총회장이 선언하다.
손 목사는 1998년 4월 21일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그렇게 그리워하며 사모하던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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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제53회 총회장 손계웅(孫啓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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