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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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언어 예술을 통해서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인류를 감동시키는 담론을 계발하기 위해서 사색하고 독서하고 글쓰기를 연마합니다. 그 담론이 괴테와 같이 독일을 통일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하고, 톨스토이와 같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평화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기도 하지요. 그리하여 작가는 위대한 글이 나오기까지 쉬임없이 인간과 자연과 문화의 멋을 창출하지요. 최근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언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갈구하고 있지요.
필자도 작가가 되기까지 부단한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온 것 같습니다. 예술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체현하기 위하여 여자 무용수들 틈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무용을 배우기도 하고, 난해한 철학 서적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한 번도 후회를 하지 않은 것은 내가 천성적으로 작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자존감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34년간 걸어왔던 교육자의 길을 과감히 내던지고 작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지요. 내가 전업 작가라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은 하루를 온전히 글쓰기에 매진하면서 글과 놀이를 하고 글을 통해서 아름다운 세계를 몽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수많은 스승을 찾아다녔습니다. 시인 서정주 문덕수 선생 등을 찾아다니며 장르론도 익히고 문장 실습도 하였습니다. 스승은 내가 작가로서의 정도를 걸어갈 수 있도록 나침판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배운 것을 직접 글로 체현하는 데에는 나만의 사색과 독서와 글쓰기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삼십여 년간의 글쓰기에서 터득한 것은 ‘탈경계’였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하여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 트라우마를 겪었지만, 아직도 분단의 경계는 풀어지지 않은 채 수십만 명이 이산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카인의 질투처럼 동족끼리 상대를 비방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계를 푸는 데에는 카인 콤플렉스-형제끼리 질투하며 싸우는 데에 치중하는 콤플렉스-를 극복할 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과정을 겪으며 인류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여 화해와 용서의 담론이 온 세계에 전파된 바와 같이, 탈경계는 남과 북, 진보와 보수, 동과 서로 갈린 경계를 해소하는 담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담론을 통하여 김정은이 평화의 감각을 받아들이고 남과 북이 민족의 동질성과 멋을 추구할 수 있다면, 탈경계는 성큼성큼 일어나서 한국인의 기질을 더욱 고양시키는 멋을 추구하게 할 것입니다.
탈경계는 비단 정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 사이에도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수많은 평론을 읽으면서 너무 어려운 비평 용어들로 인하여 작가와 독자의 소통이 멀어지고 작가들이 글감옥에 갇혀 대중성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글은 독자에게 놀이로서 작용하면서 감동을 주어야 할 텐데 글만의 감옥에 갇혀 도서관 서고에 갇혀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생선 가게에 아무리 싱싱하고 좋은 생선이 있어도 소비자가 사 주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 일을 위해서는 작가가 글 밖으로 걸어나와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가 작가가 되겠다고 작심하게 된 것은 李箱 때문이었습니다. 고교 시절 이상의 「날개」를 읽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행동이 당시 관습으로는 파격적이어서 ‘아, 이런 세계도 있구나’ 하는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아내’라는 인물들을 보니 작가가 직접 체험한 기생 금홍과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작가의 체험은 그만큼 작품에 대한 개연성을 높여 주었던 것이지요. 작품에 나오는 새롭고 멋진 인물들을 생각하며, 대학 시절 이상의 「날개」에 대한 논문을 처음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학술상도 타고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면서 나도 저런 멋진 세계를 연출하고 싶은 소망이 생겼습니다. 작품이 작품을 낳는다고 좋은 작품을 보면 나도 저렇게 좋은 작품을 써 보겠다는 오기가 생긴 것이지요.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감동을 주려면 작가가 먼저 자신의 글에 대한 감동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수많은 적극적 독자들이 작가가 되겠다고 팔을 걷어부치는 걸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편의 글을 생산하기 위하여 수없는 시간을 사색과 독서와 자료 찾기에 쏟아붓는 열정이 없는 한, 좋은 글이 나오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남들이 알아 주지 않는 시간과 정성을 들이면서도 좋은 글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과 흥분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글을 씁니다. 영원 위에 남을 만한 흔적이 있다면, 나는 지금 현재, 그것을 주워 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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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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