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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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신안군 태생
박요한(朴堯翰 1918.5.6.~2016.10.30) 목사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진리라는  전형적인 어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던 1918년 조선이 이미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 미래가 내다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였고,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일본 경찰들이 장악해 조선총독부의 약탈과 천대만이 조선 전체를 휩쓸고 있을 때였다.
그는 1936년 18세 때 선교사들이 세운 순담청년성경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교육다운 신식교육에 접할 기회조차 없었다. 당시 호남지방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목포 광주를 비롯 순천에 이르기까지 선교사역이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지역에 개척되는 교회마다 병설하거나 아니면 독립적인 기독교계통의 학교가 세워졌다.
공식적인 학교라는 기구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서는 교회 안에서 비형식적인 형태로 주일학교를 비롯 주간학교(週間學校)도 간혹 운영되었고, 때로는 여름과 겨울 농한기를 이용 달성경학교(月聖經學校)와 같은 일정기간 안에 단기적으로 성경과목을 비롯 일반교과목을 편성하여 교인들의 자녀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불신자들의 자녀들까지 가르쳐 전도의 발판을 마련했고, 또 간접전도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요한 소년도 청소년기가 되기까지 제대로된 초등교육(初等敎育)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부모들의 일손을 도우며 성장해 오다가 드디어 정규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가 온 것이다.
1936년 3월 순담에 있는 청년성경학교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었고, 졸업한 후 1943년 12월부터 함평군 손불면에 있는 궁산교회(宮山敎會)에 전도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목회자의 길로 나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식민지 치하에서 생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일군으로 출발하게 되었으니 축복이 아닐 수 없었고, 이 젊은 청년지도자에겐 구원의 진리를 전하며 가르치는 목회자의 길목에서 온 정성을 다해 복음을 위해 젊음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고, 그것이 청년 요한 전도사에겐 큰 보람이었고 사명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박 전도사는 그해 11월 당시 남한 유일의 총회에서 인준한 경성의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전신)문을 두드렸다.

지방 성경학교 출신으로 조선신학교 입학
함평군 궁산교회 전도사로 목회 시작
신앙의 절개 굽히지 않는 강인한 성격의 지도자
대전남부교회 총력 전도로 부흥
“성전은 예배 행위 이외엔 어떤 행사에도 사용불가”
 
입학 후 3년 만에 1947년 12월 본과 신학과정을 이수하고, 당시 조선신학교 교장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박요한은 1948년 7월에 보수주의와 개혁보수를 지향하고 새로이 출발한 박형룡 박사가 이끌고 있는 장로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본과로 진학, 졸업 후 1949년 5월 10일 목포노회(木浦老會)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스스로 세운 목회철학(牧會哲學)이 있었다. 그것은 청렴과 절제 그리고 교회와 신학의 세속화로부터 보수개혁 신학 과 칼빈의 하나님 절대주의 신학의 기초 위에 철저한 청교도적인 실천신앙에 역점을 두었고, 자신만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며 지도해 나갔다.
박요한 목사는 1967년 10월 13일 한국의 중심지에 있는 대전남부교회(大田南部敎會)의 청빙을 받았다.
박목사는 일제의 핍박 아래서와 6.25 당시 공산당의 위협 아래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은 대쪽같은 강인한 성격의 지도자였다.
박 목사는 한국교회 역사속에 길이 남아있는 <조선신학교 51인  진정서 사건>의 일원이었고 주인공이었다. 1947년 김 교수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에 반대하는 51인의 신학생들이 연명한 진성서를 1947년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3회 총회에 제출했던 사건을 말한다. 이 진정서에 서명한 당시 대표적인 교계 인사들로는 박요한, 김준곤, 신복윤, 조동진, 차남진, 한완석, 박창환, 황규석, 임병길, 김상대 등이었다. 이들 중에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크게 헌신하고 봉사한 분들이 많았다.
박 목사는 1967년 10월 대전남부교회에 부임하여 1987년 은퇴할 때까지 20여년을 치밀한 목회계획을 세워 교회를 섬기며 성공적인 목회의 길을 걸었다. (대전남부교회50년사, 임해순편 2005, p.80~81 참조).
6.25 전쟁으로  피난길에 나서면서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던 교인들이 9.28 수도서울수복으로 하나 둘 대전으로 돌아와 교회로 모여들었고, 외지에서 피난 와 대전에 정착한 피난민들도 합세하다보니 교회는 점점 안정기로 접어 들게 된 것이다. 이 무렵에 박요한 목사가 남부교회에 부임, 목회현장을 지키게 된 것이다.
교회성장이란 목표달성을 위하여 박목사는 전도전략의 일환으로 교구 확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1968년부터 1971년가지 4년 동안은 교인 배가운동을 추진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1972년부터 매월 마지막 주일을 전도주일로 선포하고 상시 전도활동을 해 나섰다. 이 전도운동은 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에 큰 활력을 불어 넣었고 청년교인들에겐 어깨에 교회명의 성구가 새긴 띠를 띄고 적극적인 전도운동에 힘을 기울이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총력 전도운동에는 대전에 주재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도움도 컸다. 미국 장로교(P.C.A.) 소속 신내리(Rev. Sneler Alvin Roy, 1959 래한) 선교사와 현요한(Rev. Hunt John K, 1958 래한) 선교사 등이 차량을 지원하여 주었고, 당시 전도운동에 조직적이고 기동성이 있게 하였다. 이 전도운동은 교회주변 뿐만 아니라 변두리 지역이었던 가수원 지역에는 의료팀이 나가 진료함으로 큰 성과를 가져왔다.
당시의 의료선교는 의료품 지원이 이루어져 전도에 큰 도움이 되었고, 전도운동에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 운동에 전교인들이 참여함으로써 한 영혼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전도운동에 큰 기초가 되었다.
1972년 부터는 주일 낮예배시간 참석 인원이 300명을 넘어서면서 1968년도의 10개 교구에서 1978년에는 14개 교구로 증가했고, 1987년에 이르러는 25개 교구로 크게 성장 확대되었다. 중형교회에서 대형교회로 성장하는 기초를 놓게 된 것이다.
교회는 전도운동을 통해 내실을 기함과 함께 대외적인 섬김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교회 안에 있는 베드로전도회는 공주군 반포면에 있는 경천교회를 후원하게 했고, 요한전도회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영산도교회를, 마리아전도회는 금산군 복수면 염정교회를, 수산나전도회는 신안군 흑산면 오리교회를, 청년회는 신안군 흑산면 하태도교회를 지원하도록 자매결연을 맺게하여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
한편 교인들을 향하여서도 지속적인 신앙성장을 위하여 주일성수와 십일조로 헌신적인 삶을 강조함과 동시에 경건생활의 장려를 위해 새벽기도회 강조, 단기성경학교를 설립, 때로는 달(月)성경학교를 개설 교인들에게 건전한 개혁주의 신앙생활의 지속을 위해 말씀과 신앙, 기도생활의 조화를 강조하는데 주력하였다.
박 목사는 교정(敎政)에도 자신의 능력을 활용, 교단을 위하여 여러 방면에 헌신하였다. 남부교회가 속한 대전노회와 충남노회장을 위시하여 1986년 10월 교단지 기독신보 이사장, 1987년 5월 제6대 대전신학교(총회인준)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에 앞서 1973년 9월 20일~24일까지 인천제2교회에서 모인 예장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됨으로써 교단의 수장에 올랐다.  
그가 재임했던 총회의 중요한 결의안을 몇가지 살펴보면, ① 타교단과 연합사업을 하거나 강단 교류에 대해서 총회결의 위반했을 때는 해당노회로 하여금 시벌키로 하다. ② 타교단 인사들과 초교파적으로 연합(관계)하고 있는 자는 노회가 시벌하도록 하다. ③ 정치문답조례는 본 총회가 제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고로는 사용할 수 있으나 수정할 수는 없다. ④ 앞으로 개척하는 교회는 무지역노회 가입을 억제하기로 하다. ⑤ 국가 행사시 국기경례 후 맹세하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므로 각 교회에 지시하기로 하다. ⑥ 성전(예배당 및 부설시설물 포함)은 예배행위 이외엔 어떤 행사로도 사용할 수 없다는 일임을 결의하다.
박요한 목사는 1987년 7월 30일 대전남부교회의 원로목사로, 명예로운 복음사역을 마치고 퇴임해 있다가 2016년 10월 30일 88세를 일기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안기었고, 11월 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總會葬)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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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제58회 총회장 박요한(朴堯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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