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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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 작가 李箱은 글만 잘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글 밖으로 걸어나와 일상에서도 작가로서의 멋을 추구하였습니다. 1930년대에 실제로 있었던 일화입니다. 당시 시인들은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며 낭만을 즐겼습니다. 누군가 신문사에서 원고료를 타면 동료 문인들을 불러내어 술을 사는 풍조도 있었습니다.
당시 李箱(1910-1937)은 1931년 <조선과 건축>지에 「이상한 가역 반응」을 발표한 이후 「오감도」등 초현실주의적이고 실험적인 시들를 발표하고, 소설「날개」(1936)를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정주도 1936년 <동앙일보>에 시 「벽」이 당선된 후 그 해 11월에 김동리 오장환 함형수 등과 <시인부락>을 창간하여 “인간 생명의 究竟的  경지를 탐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박두진 박목월도 1939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지에 작품을 발표하기 전부터 서정주 李箱 등과 어울렸습니다. 그때 서정주는 이 폐결핵에 걸린 사실을 몰랐습니다. 서정주의 증언에 의하면, 李箱은 매우 멋진 신사로서 하얀 맥고 모자에 흰색 양복, 흰색 구두를 신고다녔다고 합니다. 한 번은 李箱 서정주 박두진 박목월이 종로에서 만나 통의동에 있던 ‘보안여관’- 1930년대에 개업하여 2006년 폐업한 여관으로, 서정주·김동리·오장환·김달진 등이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기도 하였던 장소- 근처에 있는 일본식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 술집은 다다미방으로 되어 있고 주방 옆에는 스웨터를 입은 여주인이 앉아 있었는데, 李箱은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여인의 스웨터 제일 윗 단추를 꾹 누르는 것이었습니다. 여주인이 “왜 그러세요?”라고 몸을 뒤로 빼도 그는 단추를 계속 눌렀습니다. 이를 본 서정주가 “김형(李箱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왜 그래요?” 하며 옆에 다가서도 그는 이마에 땀까지 흘려가며 단추를 꾹 누르더니, 한참만에 서정주가 그의 팔을 잡으며 그만 다다미 위로 올라가자고 하자 누르기를 그치더라는 겁니다. 서정주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李箱은 모더니스트여서 당시에 물질문명이 가져올 위급한 상태를 예감하고 단추를 비상벨로 착각하고 계속 눌렀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일화를 듣고 필자는 작가가 글로만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글 밖으로 걸어나와서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당시 李箱은 폐결핵 3기로 인하여 자신의 삶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알고 25세부터 본격적으로 「오감도」등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짧은 기간에 십여 편의 소설과 수백 편의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객혈 이후 마지막 남은 4년의 삶이 매우 소중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글 뿐만 아니라 글 밖의 일상도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내성적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생 금홍과의 동거 생활을 끝낸 후 옛 화신 백화점 지하에서 이순석이 운영하던 낙랑 다방에서 화가 구본웅의 서모가 낳은 변동림을 만나게 됩니다. 아는 시인으로부터 소개를 받기로 한 날, 李箱은 평소와는 다른 스타일을 하고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방 <제비> 등의 파산 이후 몸도 병약하였기에, 평소에 머리를 자주 안 감아 봉두난발에 까치집같은 머리를 하고, 와이셔츠는 때가 묻었으며, 골덴 바지에 구두는 진흙이 잔뜩 묻은 너저분한 구두를 신는 등 예전의 하얀 양복 차림의 멋진 모더니스트 차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모처럼 선 보는 날이니 세수를 하고 나갈 작정이었으나, 약속 시간이 촉박하여 그냥 나가고 말았습니다. 막상 다방에서 변동림을 만나고 보니, 이화 여전 문과를 졸업한 여류 작가에 미모를 갖춘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맘에 쏙 드는 이 여인 앞에서 그는 여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 그만 조그만 종지 그릇에 있는 각설탕만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근데 며칠째 손을 씻지 않았던 터라 그만 각설탕이 손때로 인해 시커멓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레지가 와서 다 큰 어른이 이렇게 더럽게 해 놓으면 돼냐며 한바탕 퉁을 주는 바람에, 소개한 시인과 함께 그들은 다른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여인 앞에서 얼굴만 빨개지면서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정작 마음에 드는 여인 앞에서는 그렇게 쑥스러운 모양입니다. 결국 그는 속으로 ‘인연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하고 헤어졌는데, 며칠 뒤 뜻밖에도 중매한 시인으로부터 그녀의 편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편지에는 그가 마음에 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절에 가서 둘 다 검은 예복을 입고 몇몇 친구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러한 일화만 보더라도 그가 독특한 삶을 산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는 작품 뿐만 아니라, 일상까지도 개성과 멋을 추구하는 작가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에 관한 논문은 수백 편이 넘습니다. 이는 그가 글 뿐만 아니라 글 밖에서도 멋있는 활동을 하고 감동을 주는 메시지를 전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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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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