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1.jpg
 경북 울릉도 출신
이성헌(李聖獻 1924.6.1.~   ) 목사는 경상북도 울릉도에서 부친 이종운과 모친 이계연 사이에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성헌이란 이름으로 개명(改名)이 되기 전에는 성우로 불렸다.
이 성헌이 태어난 울릉도에는 침례교 신자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해졌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울릉도 전지역에 세워져 있는 대부분의 교회는 80퍼센트 이상이 침례교회들이다.
이성헌 소년이 살았던 시대는 이미 조선 천지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간지 오래였고, 백성들의 생활상 역시 먹고 살아가기에 급급하였던 때였으니 섬이었던 울릉도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섬에서도 가난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에게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장 컷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했으나 중학교에 진학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누구보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컷지만 어찌할 수 없었던 당시의 현실이 소년 이성헌의 가슴 속엔 상처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문을 통하여 일본 대학방송통신강좌에 중학과정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비록 어려운 집안 사정이었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방송통신강좌를 통해 검정고시로 중학과정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성헌 소년이 18세 되던 해에 온 가족이 정든 고향 울릉도를 떠나 바다 건너 상상만 했던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
그에게 육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고 꿈을 실현해 낼 수 있는 활동무대였다. 그러나 당장에는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어서 먼저 생활의 기초 터전을 마련해야겠기에 양복점 보조일(시다시)을 시작해 생활비를 벌었다. 그런데 시대적 상황은 그가 또 다시 원치않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감리교 유재헌 목사 영향받아
감리교 신학교 졸업
 장로회신학교에 편입해 공부
명신홍 목사 요청으로 대구 서문교회 맡아
대구신학교 교장 등 후학 육성에 헌신
 
당시 일제는 대동아(大東亞) 경영권 확보를 위한 야욕으로 전쟁을 일으켜 조선의 젊은이들을 징병과 징용으로 내몰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래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찾아 간 곳이 강원도 철원의 일본인 농장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징집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성헌은 1945년 8월 17일자로 징병소집을 받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징병 직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성헌은 제대로 병명도 모른체 마치 중병에 걸린 환자처럼 앓아 눕고 말았다. 어머니는 장로였던 친정 아버지를 따라 신앙생활을 올곧게 하신 분이었다. 거기에다 성품까지 온화하고 인자한 분으로 성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어머니는 마음의 소원을 품고 그를 부흥회가 열려 한창 진행 중인 장흥교회로 그의 손을 잡고 데리고 갔다.
그때 부흥강사로 오신 분이 감리교의 유재헌(兪載憲) 목사였다. 유재헌 목사는 해방 전에는 일본 경찰당국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교파 배경이 없는 독립교회라는 이름으로 목회를 하다가 일경(日警)에 의해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고국에 돌아온 후에도 금강산에 연금되어 있다가 해방이 되면서 석방된 후 철원에 있는 장흥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온 것이다.
그 당시 장흥교회는 온 교회가 힘을 모아 한탄강 상류에 ‘대한수도원’을 짓고 있었다. 그 수도원은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세운 기도원이었다. 청년들은 그에게도 함께 수도원 짓는 일을 권유하였다. 수도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으나 공사를 하면서 청년들은 찬송도 부르고 때로는 간증을 하며 신앙생활의 체험을 나누기도 하였다. 이때 성헌에게는 저들이 저렇게 절실하게 열정적으로 정성을 기울여 수도원을 짓고 찬송을 부르며 봉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싶은 생각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저들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겠다는 감동이 마음에 와 닿았다. 어둡고 캄캄한 강가의 굴속에 자리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간절함 속에 기도하던 그날밤 자정이 넘었을 무렵 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성우야!(성헌으로 개명하기 전 이름)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마태 19:24). 그 굴속에서 자리를 비우고 하나님을 찾았을 때 그 분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그의 눈이 변하였다. 날마다 보아오던 것들이 새롭게 보였고 새롭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기쁨이 넘쳤고 몸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일주일 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그를 보고 유재헌 목사는 그의 이름을 성헌(聖獻)으로 개명해 주었다. 그 때가 1945년 11월 8일이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는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유재헌 목사의 추천으로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서울생활은 궁핍하였으나 학비 마련을 해가며 공부에 매진하였다.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에 모든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신학교 3년 과정을 마쳤으나 배움에 대한 열망은 더하였다. 일본 유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마침 그때 유재헌 목사로부터 부흥회 인도차 출타하게 되었으니 본 교회 설교를 맡아 달라는 부탁이 왔다. 잠시 유학의 길을 멈추고 1946년 10월부터 경기도 용인의 용인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그후 그는 다양한 교단 가운데 전통적인 장로교회 신학을 공부해볼 마음이 생겨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현 총신대학교 전신)에 편입하였다. 당시 해방 이후에 장로교신학교가 재편되면서 편입생으로 입학해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2월 12일 26세의 젊은 나이에 대구서문교회 전도사로 부름을 받고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후 서문교회 명신홍(明信弘) 목사로부터 그가 서울 장로회신학교에 강의 차 출타 중일 때 설교해 달라는 전갈이 왔다. 이 때가 1949년 11월 추수감사주일이었다. 그는 이때로부터 1995년 11월 17일 서문교회 담임목사를 아들 이상민 목사에게 물려주고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한생을 서문교회와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 한 목회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성헌 목사는 그의 신앙의 멘토가 되어 준 유재헌 목사의 딸 유인애와 결혼하였으며, 1969년 9월부터 총신대학교에서 설교학을 강의하였다. 1971년 9월엔 대구신학교 교장(현 대신대학교 전신)으로 취임하였고, 1974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 모인 세계복음화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 1976년 7월 미국 페이스신학교로부터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1988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자기가 시무하고 있는 서문교회에서 개회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3회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교단의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이성헌 목사가 총회장에 피선됨으로 대구 서문교회는 염봉남 목사와 명신홍 목사에 이어 세 분의 총회장을 배출하는 역사적인 교회로 발돋움하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이성헌 목사가 서문교회 재직시에 특기할 만한 일 가운데 중요한 사건을 열거해 보면,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으로 남하한 많은 피난민들에게 서문교회가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돌본 사실과, 곤경에 처한 피난민들에게 희망과 소망의 말씀으로 목회함으로 생활터전을 마련하는데 큰 힘이 되어 준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다음으로는 1959년 제44회 총회분열로 WCC측과 NAE측의 갈등으로 빚어진 교회 처신이 어려웠을 때 NAE측에 서서 서문교회를 예장합동측에 남게한 공이라 하겠고, 셋째로는 이런 와중에 교회당 점령세력과 탈취세력 가운데 소위 교회 안에 오물투척사건이 발생했지만 이를 지혜롭게 잘 극복한 일과, 마지막으로 오늘의 대 서문교회로 성장 부흥의 원동력이 되게 한 목회역량과 지도력을 들 수 있다. 더불어 한 가지 첨가할 것은 그의 물흐르는 듯한 설득력이 돋보이는 설교에 있었다.(대구서문교회100년사, 대구서문교회 2016 초판 p.298~345 참조).
이러한 배경이 그를 서문교회의 지도자에서 대구영남지역의 지도자로, 나아가서는 전국적인 지도자로 발돋음하게 한 발판이 되었다.
이성헌 목사가 재직했던 제73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몇가지 살펴보면, ① 찬송가 261장은 우리교단 교회에서 부르지 않기로 가결하다. ② 해마다 발행하는 신앙월력은 전도부에서 간행하기로 가결하다. ③ 기독신보 이사 선임은 노회별 총대 비례대로 하되 총대로만 이사를 구성하기로 하다. ④ 평동노회를(평동노회와 평양노회) 분리하기로 가결하다.
이성헌 목사는 슬하에 3남1녀의 자녀를 두었고, 그 중 장남 성민 목사가 아버지의 목회사역에 대를 이었다.(제98회 총회결의 및 요람, 김영남 황기철 편, 예장총회 2014, 서울 p.28 참조).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67. 제73회 총회장 이성헌(李聖獻) 목사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