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1.jpg경북 구미 태생
정규선(鄭奎善 1918.3.20~1990.11.17)목사는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上毛洞)에서 정인명 장로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상모에는 1901년에 언더우드(Under-wood)에 의해 세워진 장로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는데, 한강 이남에서는 초기 선교사로 경성 신문내(新門內·새문안)교회를 세운 언더우드가 세운 첫번째 교회였다.
이 마을은 동래 정씨들이 일촌을 이루고 살았던 집성촌이었는데,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당시 규선의  아버지 정인명이 이 교회의 장로였는데, 그 당시로서는 꽤나 살기에 넉넉했던 중농(重農)의 가정이었다.
정 장로는 아들 규선을 일본 경도(京都)에 있는 성봉중학교(聖峰中學校)로 유학을 보내 공부시켰다. 규선은 5년제 중학교를 일본에서 마치고 동경으로 가서 일본대학을 1943년에 졸업하고 귀국해 경성에 있는 동양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성결교신학교인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현 서울신학대학교)로 가서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에 졸업하고 경북 김천시 황금동에 있는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해 첫 목회의 길을 시작하였다.
장로교인이었던 정규선이 성결교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를 나와서 장로교에서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엔 평양으로 갈수도 있었지만 3.8선 이남에 있는 서울에서는 장로교에서도 교리적으로 복음주의 노선을 걷고 있던 경선신학교를 나온 신학생들이 목회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오늘처럼 교역자의 포화상태가 아니어서 희생적인 목회자와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지도자들이 자유롭게 교파를 가리지 않고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성결교회 교단에서 월간 신앙지 활천(活泉)지를 통해 한국교회 안에 성결교 소속 경성신학교 출신들이 크게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교단적으로서 자연스럽게 용납되었다.
오늘날 예장합동과 통합측의 지도자들의 면모만 보아도 경성신학교 출신 장로교인들이 장로교회 안에서 목회에 성공한 인사들이 많이 있다. 우리교단의 지도자들이 된 사례들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정규선 전도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1951년 5월 경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경북 북부지방에 있는 점촌제일교회로 목회지를 옮겨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장기목회를 하였다. 이 기간이 정규선 목사에겐 목회 황금기였다고 보여진다.
1959년 9월 제44회 예장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였는데, 경기노회 총대 문제와 소위 에큐메니칼 지지와 반대의 이슈로 말미암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는 불행한 사태가 야기되자, 이 파급영향이 전국 각 노회로 그대로 이어지게 되어 한국장로교회가 6.25 전쟁 이후 가장 비극적이고도 혼란한 사태가 교회 안에 불어닥쳤다.

장로교인으로 성결교 경성신학교 출신
1959년 분열 당시 반에큐메니칼 노선 택해
유교적 훈육받은 유학자다운 기개 가져
대구신학대학 학장 역임
교정에도 능해 경서노회장 5회 연임

전국 교회와 노회가 에큐메니칼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지게 되자 각 지역의 노회로 이 정치사태가 그대로 어어지게 될 때, 경서노회 안에서 반에큐메니칼 전선의 선두에 서게 된 지도자가 바로 정규선 목사였다.
정규선 목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합방으로 조국의 미래가 암담했던 시기에, 또 아버지 정인영 장로의 선견지명의 기독교신앙의 안목으로 아들 규선을 중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선진국 일본에 유학을 시켜, 강직하고 철저한 현대문명을 접하게 한 것이 정규선 목사가 교회지도자로써 활동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엔 통합측으로 기울어진 교회들도 많았지만, 정 목사는 한국교회의 보수신학과 개혁주의 신앙을 지켜 나가는데 경서노회의 지도자로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데 필요한 교정(敎政)의 경험을 경서노회를 지키므로써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 기간동안 정 목사는 동역자들과 후배들의 인정으로 경서노회 노회장을 5회나 연임하기도 했고, 그가 경서노회 지도자로 있을 때 노회가 설립한 경서고등성경학교 교장으로 지방의 평신도지도자 양성에도 심혈를 기울였다. 정규선 목사는 점촌제일교회를 사임한 후 잠시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충무교회와 대구 반야월서부교회에서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구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같은 문중 출신 정규만(鄭奎萬) 장로가 필생의 과업으로 한강이남에서 화강암으로 건축해 세운 대구 서현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하기도 하였다.
정규선 목사는 유교적인 가문에서 훈육을 받고 일본에서 신식교육을 받아서인지 그의 풍모에는 유학자다운 선비의 모습과 현대교육의 결과인 포용력과 엄격함과 추진력은 오늘의 젊은이들이 흉내낼 수 없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말 그대로 양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
잠시 목회일선에서 쉬고 있던 그가 총회신학 인준신학교로 있던 대구신학교(大邱神學校·현 대신대학교) 초대학장으로 1981년 8월 취임하게 된다.
그는 대구신학교로 부름받기 전에도 리더쉽을 인정받아 총회임원(부회록서기)을 비롯, 영남협의회 회장(1968), 초대 영남대회장(1969)을 역임한 바 있었고, 대구신학교가 대구신학대학으로 인가 승격이 되자 학장이 되었다.
그가 대구신학대학 초대학장으로 재직했던 시기에 여러가지 어려웠던 학내 사태도 지혜롭게 정리되었고, 1987년엔 교단의 공기인 기독신문 사장이 되어 마지막 교단을 위한 봉사를 하기도 했다.
2015년 9월 총회출판부에서 간행한 <역대 총회장 증언>에 실린 그의 육필설교 ‘가장 높은 차원의 은혜’란 설교문을 보면, 그의 신앙관과 목회이념을 엿보게 하는 영성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본문은 고후 12장 7~10절을 기초하여 설교한 것인데, 정 목사는 여기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은혜라고 하면, 죄에서 구속받은 것은 너무나 큰 사실이기에 예외로 하고 세속적인 면에서 보통 생각할 때 병들었던 자가 기도로 나았다든가, 가난한 이가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든가, 그 외에 여러가지 자기의 기도하던 바가 하나하나 이루어졌을 때 쾌감을 느끼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을 바로 믿고 진실되게 살아나가는 성도들은 남이 볼 때나 자신이 생각할 때도 분명히 불행스럽게 된 상황에서도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간증한 이 은혜를 가장 높은 차원의 은혜로 여겨야 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가시를 주신 것을 큰 은혜로 생각했다. 둘째 기도의 불응답을 오히려 심오한 은혜로 생각했다. 셋째, 남보다 수고 많이 한 것을 은혜로 생각했다고 하면서 끝을 맺었다.
이것은 정규선 목사의 평시 목회관이었고, 그의 신앙적인 삶의 표현을 이렇게 고백한 것이라 보여지는 것이다.
드디어 1971년 9월 23일부터 28일까지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6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의 수장에 올랐다. 그가 총회장 당선 소감을 말했을 때, 그 어느 총회 때보다 더 회한이 컷을 것이다. 왜냐하면 1959년 9월 모였던 교단의 큰 상채기를 내었던 대전중앙교회(제44회) 현장에 그가 섰지 않은가?
그가 재임했던 제56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타교파(고려파, 기성, 예성 제외) 강단 교류를 허락하지 않는다. ② 제주노회를 복구하기로 하다. ③ 총회신학대학의 이사회(재단과 일반(운영))를 재편하기로 하다. ④ 총회센터를 건립하기로 하다. ⑤ 성서공회에서 출판한 공동번역성경을 본교단에서는 사용하지 않기로 하다. ⑥ 대만장로교총회와 일본개혁장로회와는 우호관계를 맺기로 하다.
정규선 목사의 자녀로는 서울 사랑의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정은숙 권사가 있다. 정 목사는 1990년 11월 17일 88세를 향유하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그의 딸 정은숙 권사에 의하면, 아버지 정규선 목사는 공적인 일에는 한없이 엄하고 정의로웠고 원칙에 따른 삶을 사셨으나, 가정에서는 그렇게 자상하고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였다고 증언했다.(2016.12.29 전화 인터뷰)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68. 제56회 총회장 정규선(鄭奎善) 목사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