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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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용띠 출생(1940년생)인 필자는 1970년대에 아직은 혈기 방종한 30대였었다. 당시 한 지방대학의 교수직에 있었던 나는 당시의 사회·정치적 분위기가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아마도 그 불편한 심기를 강의 도중에 은연중(아니 자주?) 토로했었던 것 같다. 결국 77년에 나는 긴급조치9호 경합범으로 구속되었고 3심의 재판과정을 거쳐 실형을 언도받아 실제로 2년 4개월의 영어(囹圄) 생활도 하게 되었다.
1979년 김재규 주도의 10·26 사태가 터져 긴급조치 9호법이 폐지되면서 나는 그해 말 감옥에서 출소하였고, 1980년 2월말 대통령 특별사면을 받아 복권이 됨으로써 3월초에 옛 대학으로 복직까지 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복직 교수의 근무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복직 후 2개월 반이 지난, 5월 18일 일어난 광주 민중항쟁(민주화운동)의 여파로 결국 대학교수직에서 다시 물러나야 했다.
그때 전국적으로 나 말고도 80여 명의 교수들이 함께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었다. 그때 물러난 교수들은 나처럼 70년대에 해직되었다가 80년 3월에 복직한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알려졌다. 시쳇말과 연관시켜 표현해 보자면, 70년대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교수들은 80년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그 처지(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요즘 블랙리스트 문제가 커다란 사회·정치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블랙리스트 4인방이란 말도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편이다. 지금 특검에서는 블랙리스트 작성의 실제 책임자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그 피해 실상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하여 사실(査實)하느라고 동분서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특검이 그 사실의 결과를 명쾌하게 발표할 날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시점에서 다음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더 기울어지고 있는 편이다. 우리 정부가 주도해서 요즘 크게 지탄받고 있는 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1만여 명 안팎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압박해 들어갔다고 한다면 현 정부의 그 고위 인사들은 ‘블랙(暗黑) 정치’에 앞장선 인사들로 평가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누구를 암흑인사(블랙리스트)로 특별히 지목해 해(害)를 끼치는 일은 엄연한 반헌법적, 반인권적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암흑 정치에 체질화된 인사가 아니고서는 이런 만행에 앞장설 수가 없는 법이란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야만적인 행위가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 극성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블랙리스트는 현 정부에 들어와서 다시 살아난 일종의 긴급조치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70년대의 긴급조치법들(1·4·9호들)은 다른 말로 표현해 당시의 블랙리스트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오늘날의 블랙리스트는 70년대식 긴급조치법의 현대판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70년대의 긴급조치와 오늘날의 블랙리스트는 그것들이 어느 면 살생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면에서 닮아 있고, 또 실제적으로도 제왕적 통치자 부녀(父女)가 바톤을 서로 주고받아온 처지란 면에서도 그러하다고 보는 게 무리하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 시니어 박 대통령과 주니어 박 대통령으로 편의적으로 나누어 양인(兩人)을 구별해 보기로 하겠다(여성에겐 ‘주니어’란 식의 표현이 맞지 않다고 지적해도 괘념하지 않기로 한다). 최근 주니어 박 대통령은 부친(시니어) 박 대통령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박정희 기념관을 사비(私費)도 아닌 건립비 200억을 들여 건립한 데서 그 면이 엿보인다. 국정 역사교과서를 통하여 부친의 업적을 지나치게 내세우려 하는 데서도 그 점이 훤히 엿보이지 않는가? 교과서에 혁명 공약의 어떤 부분은 완전히 빼버리고 다른 구절을 새로 만들어 넣었다는 말도 들리는데, 그러면 이때는 “나는 그런 바 없다. 교과서 편찬자들이 한 일일 뿐이다.”라고 변명해 버리기만 하면 끝날 일일까? 
이런 무리가 따르다 보니 시니어 박 대통령 때처럼 현대판 긴급조치라 할 블랙리스트가 등장하게 되는 법이다. 강압적인 방법이 아니고서는 비판자들의 입을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들을 오래 사용해 그 적폐가 누적되다 보면 결국에는 집단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법이다. 특검을 중심으로 한 오늘의 사법 발동 사태는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 정부는 과거의 긴급조치 피해자들에게 재심의 기회를 주어 많은 이들이 재심 과정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게 해주었다. 그러나, 한 편에선 이런 일을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론 현대판 긴급조치로 그들을 다시 엮는 일을 했으니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과거(70년대 말)에 블랙리스트 교수들을 사면시켜 80년대 초(신학기)에 복직시켜 놓고는 5·18 직후 다시 그들을 잘라냈던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의 어두운 면을 떠올리게 한다. 블랙(暗黑)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블랙리스트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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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와 블랙 정치 / 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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