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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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읽을 때마다 본문에 소개되는 이 청지기가 과연 슬기롭게 행하였는가? 또한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성경에 적힌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부정직한 청지기처럼 주인으로부터 착복한 재물로 더불어 친구 삼는 일이 맞는 것인가? 친구 삼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성경의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어떤 부자에게 한 청지기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비난이 주인의 귀에 들렸다. 그래서 그 주인은 그 청지기를 불러 해고 통지를 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이 청지기는 앞으로 먹고 살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체면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하나의 좋은 묘수를 짜냈다.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을 진 채무자들을 일일이 불러 채무를 자기 멋대로 탕감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채무자에게 “당신은 얼마 빚졌습니까?” 하고 물어서 그의 대답이 “기름 백말입니다” 하면 그 청지기는 채무 문서를 가지고 와서 “빨리 오십이라고 쓰십시오.”라고 말하며 오십 말을 탕감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밀 일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팔십이라고 적으라고 하여 밀 이십 석을 탕감해 주었다. 주인이 이 소식을 듣고 이 불의한 청지기가 슬기롭게 행하였기 때문에 칭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신들의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슬기롭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으라, 작은 일에 충성하라, 불의한 재물에 신실하라, 남의 것에 충성하라,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이어서 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어디에서 끝나는지에 대해서도 논쟁거리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에 따라서  7절, 8절 상반, 8절 하반, 그리고 9절에서 예수님의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끝난다고 주장한다. 8절 상반절은 여전히 불의한 청지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언급하고 있고, 8절 하반절은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적용의 말씀이기 때문에 8절 상반절에서 끝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데 주인의 재산을 횡령한 이 청지기의 하는 짓이 과연 슬기로운가 하는 점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 청지기를 가르켜 “정직하지 못하다”고 이미 판정하셨다. 헬라어 “아디키아”(α’δικι、α)는 말은 주로 “불의하다”(unjust)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불의하다”는 말보다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의미가 더 적절하다. 그래서 이 부정직한 청지기의 하는 짓이 그 파면당한 청지기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슬기롭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말은 분명 상식적으로 옳지 않다. 부정직한 자가 아무리 슬기롭게 한다고 한들 그는 부정직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부정직한 자가 자기가 살기 위해 짜낸 짓은 분명 교활한 꾀이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어 성경이 KJV을 따라 “슬기롭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프로니모스”(φρονι、μοV)라는 말은 “교활하다”(shrewd)는 의미이다. “약삭빠르다” 혹은 “영악하다”는 말도 같은 의미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활하다” 혹은 “영악하다”는 말보다는 “약삭빠르다”는 의미가 본문의 문맥상 더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이 부정직한 청지기는 슬기로운 것이 아니라 자기 살기 위해 약삭빠른 짓을 한 것이다. 현대의 영역본들, ESV, NET, NIV, NAS, RSV 등은 “교활하다”는 의미의 “shrewd”라는 어휘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사귀어라. 그러면 그것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것이다.”(눅 16:9)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에크 투 마모나 테스 아디키오스”(ε’κ του~ μαμωνα~ τη~V α、δι、αV )를 여러 역본에서 “불의한 재물”로 번역하고 있는 데, 이곳의 “아디키아”(α’δικι、α)를 역본들이 여기서는 “부정직하다”가 아니라 “불의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재물 자체가 불의하거나 부정직한 것은 아니고 그것을 정의롭거나 정직하게 사용하지 못한 때문에 불의하게 불리고 있을 것이다. NIV, NET는 “세속적인 부”(worldly wealth)라고 번역하고 있다. “맘모나스”(μαμ〔μ〕ωνα~V)는 아람어로 소유(possession) 혹은 부, 재산 (wealth)을 의미한다. 여기서 “맘몬”이라는 말은 마치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의인화 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친구 삼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포이에사태 피루스”(ποιη、σατε φι、λουV)라는 말은 “친근하게 대하라”는 의미가 더 가깝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 삼으로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도 이 청지기처럼 약삭빠르게 살라는 말씀인가? 이 청지기가 채무자들의 빚을 자기 뜻대로 탕감해 주는 일을 할 때는 이미 그는 주인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채무자들을 부정하게 도와주고 자기의 앞날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청지기를 칭찬하신 점은 바로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이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고 계속 죽음의 낭떠러지로 밀려 갈 수는 없다. 살 길을 찾아야 한다. 마치 이 부정직한 청지기가 살 길을 찾기 위해서 발버둥 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약삭빠른 일을 무엇인가 해야 한다.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잠간 동안의 청지기일 뿐이다. 이미 해임 통보를 받은 부정직한 청지기들이다. 지금이라도 곤고한 날들, 자기 영혼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재물을 자기의 영혼을 위하여 약삭빠르지만 지혜롭게 써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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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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