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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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이 다가와 내게 감춘 비밀을 묻는다/ 난 산을 훔쳐보며 엿듣는 거라 말했다/ 산과 나 바다는 한 끈 속 출렁이고 있었다.// 산이 작은 도시의 바다를 내려다 본다/ 늘 고여 오르는 열기에 숨을 헐떡인다/ 묵묵한 그의 마음자리 새가 되어 나는 비늘.// 벌레의 울음소리 산을 가득 덮는다/ 수도자는 비질로 울음을 쓸어 담고/ 그래도 남는 밀어를 혼자 안고 듣는다.// 산이 다가와 귓속말을 전하고 있다/ 입술에 묻어나는 이끼같은 산내음이// 달고도 오묘한 물빛 해동갑을 하고 있다.”(졸시,「산과 포구」에서) 산과 포구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동 지역만 가더라도 설악산 가까이에 많은 포구들이 자리잡고 있지요. 이를 보면 산과 포구는 서로 인접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어떤 이는 산만 보이고, 어떤 이는 포구만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산과 포구를 아울러 볼 수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조선 시대의 당쟁도 동인이든 서인이든, 노론이든 소론이든, 다 맞는 말을 하지요. 그러나 자기 색깔만 주장할 때, 상대를 유배시키고 사약을 내리는 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산과 포구」란 시를 지어 보았습니다. “산”과 “포구”가 대화할 때, “산과 나 바다는 한 끈 속 출렁이”게 되지요. 남과 북, 동과 서, 진보와 보수 간에 진실과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안목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바다낚시를 좋아합니다. 동호회원들과 동해안과 서해안과 남해안으로 몇 차례 낚시를 다녀 보았습니다. 동해안은 청정한 바다가 좋았고, 서해안은 가두리 양식장이 인상적이었으며, 남해안은 완만하게 굴곡진 포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서산을 지나 창2리에 다녀왔습니다. 새벽 여섯 시에 출발하여 아침 해가 밝았을 때에 포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육지로부터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낚시터가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좌대 낙시터입니다. 도시의 실내 낚시터에 비하여 별로 크지 않았지만, 요새 웬만해선 바다에서 고기가 잘 안 잡히다 보니 이렇게라도 고기 잡는 쾌감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낚시터 주인은 우리 일행을 통통배로 실어 낚시터에 내려놓고는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물고기를 풀어 넣었습니다. 풀어진 고기들은 낚시 바늘을 피하는 요령이 생겨서인지 잘 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나절을 바닷바람을 맞으며 사색에 젖을 때가 많습니다.
동호회원 가운데 P는 바람잡이 역할을 합니다. 그는 물고기를 별로 잡지 못하면서도 낚시하는 분위기를 즐기는 편입니다. 언제나 들뜬 분위기로 물때 등을 이야기하며, 몇 개월에 한 번씩 낚시를 주선하곤 합니다. 한 달에 20일 일하고 열흘간 노는 그의 직업 특성상 낚시는 그의 유일한 취미 생활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일날에는 새벽부터 차량 봉사를 성가대에도 서는 신실한 신자입니다. 그의 아들이 이제 막 목사가 되어 충청도에서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나도 창립 예배에 참석해 보았지만 신도가 고작 두세 명이어서 그가 아들의 생활비를 보태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동호회원들이 “목사 아버님”하고 불러 주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흘리곤 합니다. 그러면서 “이 땅에서 상 받으면 하늘 나라에 가서 상이 없다”면서 숨은 봉사 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J는 낚시 준비하는 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바다낚시의 재미를 톡톡히 본 모양입니다. 주로 해변에서 밀물이 들어올 때에 낚시를 하는 데도 대어만 낚아올린 모양입니다. 한 번은 130센티미터짜리 한치를 잡아서 십여 명의 그곳 교인과 어울려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하니, 그가 낚시 취미를 가질 만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내도 낚시 나들이 준비를 하는 데 일가견이 있어, 이번에도 돼지 삼겹살과 부재료, 간식과 라면과 취사 도구 등을 꼼꼼히 챙겨 보냅니다. J의 장점은 언제 어디서든 기도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S는 낚시광입니다. 좋은 낚시터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어 틈만 나면 오토바이를 타고 낚시터로 달려가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S도 요즘에는 고기들이 입질을 안 한다고 투덜대곤 합니다. 그래도 그는 낚시 얘기만 나오면 금방 생기가 돌아 주위 사람들의 기분이 올라가게 하지요.
그럼 나는 어떠하냐구요. 나는 낚싯대도 없이 주로 회원들 가는 데를 따라다니는 편입니다. 이제까지 숭어 한 마리도 못 잡았지만, 낚시터의 정경을 페이스북에 올려 낚시하는 기분을 내곤 합니다. 그래도 회원들은 나를 데려가기를 원합니다. 내가 가야 분위기가 업된다나요.
이런 동호회 얘기를 하는 것은 주 안에서 행복한 삶을 인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행복은 날 위해 기회를 엿보다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행복을 잡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진짜 행복이지요. 산과 포구가 한데 어울리는 것처럼,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주 안에서 한 몸 될 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예뻐하실 겁니다. 여러분도 행복을 나누어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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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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