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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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 출생
황승기(黃承起 1938.2.17~) 목사는 충청남도 서천 출생으로 초중등교육을 마치고 소명을 받아 선지학교를 진학하기까지는 녹록한 여정이 아니었다.
승기 소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해에 태어났으니 그 시기는 일제가 조선의 목줄을 쥐어잡고 마지막 숨을 조이는 소위 일제말기여서 정말 그 어느 누구도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시기였다. 그의 성장과정 역시 순탄할 수 없는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조선의 경제하며, 정치적으로는 조선이 끝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고물기차처럼 미래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농촌에서 부모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그래도 큰 희망이었고 큰 위안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열강제국들도 조선은 염두에도 없었고 민족지도자들은 조국해방을 위하여서는 힘이 있어야 된다고 러시아로, 만주로, 미국으로 내일을 기약하고 하나 둘 해외로 떠나가야만 했다.
일제의 학정은 도를 넘었다. 이 민족을 짐승처럼, 노예처럼 취급하기 시작하였고, 내 손으로 피땀흘려 가꾼 농산물도 공출이란 명목으로 싸그리 탈취당했으며, 아들들은 징용으로, 딸들은 취직을 미끼로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로 납치돼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태어난 승기는 그래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어린 소년 시절에 8.15광복을 맞이하였고, 조국의 기초 교육기관이었던 국민학교 교육을 해방과 더불어 받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회는 정치적으로 혼란 속에 있었으나 점점 안정되어 갔고, 승기 소년 역시 교회와 학교라는 기관에서 지덕체(智德體)의 삶의 본질을 터득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충청도 남부지역 고향서 목회
인본주의적 교회성장주의 경계
교계 안팎의 여러 기관 맡아 교정에 기여
‘사랑의장기기증운동’에 적극 참여
“면직 확정된 목사는 교단 산하 교회서
성례나 예배 집행할 수 없다” 결정

1959년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 예과(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마치고, 본과(3년 과정)로 진학 본격적인 목회자 훈련을 받게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부임한 곳이 고향에 있는 고내곡교회였다. 농촌의 자그마한 교회였으나 신학훈련 후 처음 부임지라 발이 부릅트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앙적 열정을 쏟아 부었다. 얼마 후 고내리교회와 홍산교회를 거쳐 공덕중앙교회를 담임했고, 후에는 강경제일교회와 논산중앙교회에서 자리를 잡고 목회사역을 하던 중 대전남부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는 교단의 중진이신 박요한 목사로부터  후임으로 와서 목회해 달라는 부름을 받아 대전남부교회 제5대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그때가 1987년 8월 1일이었다.
황승기 목사는 주변을 신뢰하고 포용하며 후진들에겐 관대하지만 매사에 원칙 적이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만은 개혁주의적이고 보수성이 강해 자유주의적 신앙에 대하여서는 엄격하고 단호하였다.
황승기 목사는 철저한 칼빈주의에 입각하여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이 그의 목회철학이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는 성경에 입각한 정확한 해석과 적용으로 이루어졌으며, 그의 목회 역시 역사적 칼빈주의에 입각한 목회였다. 교회를 운영하고 치리하는데 있어서도 외형적인 성장을 위한 인본주의적 방법보다 성경적인 토대 위에서 교회를 이끌어 갈려고 애썼다(대전남부교회 50년사, 임해순 편, 금강문화사 2005 대전, p.96~97참조).
그의 대표적 설교라 할 수 있는 본문 사도행전 20장 25~35절을 인용한 <교회를 보수하자>라는 설교에서 그의 목회정신과 철학이 잘 표현되고 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참 교회와 거짓 교회는 그 구성원들의 신앙생활로 판별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신앙과 생활이란 합성어입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은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지금은 교회가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내우외환으로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과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수하여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서울, p.340 참조).
그에게는 교정(敎政)의 수완도 있어 교계 안팎에서 많은 직분을 맡아 교단과 교계를 위하여서도 기여하였다. 1989년 제74회 총회에서는 총회 부서기로 활동하였고, 1990년 제75회 총회에서는 서기로 교단행정을 맡기도 하였다.
총회 안에서도 법통으로 인정되어 85회기 선거관리위원장, 87회기에선 총회재판국장을 맡아 교회의 질서와 총회의 기강확립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회경목부장, 총신대학교 운영이사와 재단이사로 교단 인재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총회 인준신학교인 대전신학교 교장과 이사장으로 봉사하며 후진양성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지방에서 사역할 때에는 군(郡) 정화위원과 강경경찰서 경목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후에는 청주신학교와 대전산업대학에 출강, 사회를 위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황승기 목사의 목회사역 중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은 대사회 봉사분야가 있다. 그것은 한동안 한국교계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사랑의장기기증운동>에 심혈을 기울인 일이다. 이 일에는 설립자 박진탁 목사와 함께 초창기부터 계속 참여해 나중에 운동본부 재단이사를 맡았고, 대전 충남 본부장을 맡아 교계와 사회에 크게 기여하였다. 목회자로써, 지역사회 지도자로써 생명존중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은 그의 폭넓은 신앙과 지도력에 바탕한 일이었다.
1992년엔 대전시기독교연합회 회장직을 맡아 교계지도력을 이끌어 선교에 이바지 하기도 했다. 1993년에는 대전엑스포 당시 <EXPO 선교협의회> 대표회장으로 선교하는 공을 쌓기도 했다.
황승기 목사의 이와같은 폭넓은 대외적인 활동으로 대전남부교회를 대전의 중심교회로 인식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고, 이와같은 지도력을 인정받아 2005년 9월 27일에서 30일까지 대전중앙교회에서 회집된 제9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 수장(首長)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재임했던 제90회기에 결의된 중요 안건을 적어보면, ① 1979년에 이탈한 개혁총회(정규오측)와 합동하다. ② 총회 임원선거 규정을 <총회선거규정>으로 개정하다. ③ 성서공회와 합의에 의해 수정된 개정개역판(제4판) 성경을 본교단에서도 채용하기로 하다. ④ 2007년 1월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기념사업을 총회 산하 각 노회 교회기관 전체가 참여하여 전개키로 하다. ⑤ 서북노회 소속 평강제일교회 및 광성교회 가입을 취소하고 총신대학 교수회가 제출한 박윤식 관련 연구보고서를 총회공식입장으로 채용하다. ⑥ 총회 규칙상 총무선출과 관련 조항을 개정하다(임기 5년, 지역순환 구도로 선출) ⑦ 성경과 헌법과 총회 결의를 무시하고 교단 및 총회장을 피고로 하여 소송을 제기한 자는 교단 산하 모든 공직을 정지시키기로 하다. ⑧ 면직 확정된 목사는 교단 산하 교회에서 성례나 예배를 집례할 수 없다. ⑨ 2000년 제85회 총회에서 수정된 7년에 1차식 시무투표의 기준년도는 헌법개정일 공포(2000년 9월)로부터 시행한다.
황승기 목사는 대전남부교회 부임 후 전임 박요한 목사에 이어 한 교회에서 두번째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안았다.
슬하에는 최지선 사모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그 중 2녀는 목회자 사모가 되어 미국 유학 중에 있으며, 나머지 자녀들도 부모의 신앙을 대이어 주님의 몸된 교회의 구성원으로 성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대전남부교회50년사, 임해순 편. 같은책 p.96~97참조).
황승기 목사는 그의 체구가 말해주듯이 대전남부교회와 한국교회의 든든한 기둥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신앙의 용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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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제90회 총회장 황승기(黃承起)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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