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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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빛과 어두움의 충돌

사람이 범죄하므로 죄인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죄인이기 때문에 범죄하는가? 다윗은 인간의 출생에 대하여 매우 분명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죄의 유전적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태어나면서부터 속절없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 점에 대하여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8,19).
이와 같은 인간의 선천적인 죄악성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대부분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일보다 죄된 본성의 지배를 받으면서 악행을 일삼아 살아가게 된다. 결국 사람의 죄악적인 상태는 극도에 달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한탄하실 정도가 되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측에서 볼 때에 ‘개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최초의 개혁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바로 노아였다.
그 이후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타락과 개혁 사이를 오고가는 단진자(單振子, Simple pendulum: 좌우로 흔들리는 추)운동을 보게 된다. 노아 이후의 부흥기에 뒤따른 바벨탑 사건, 아브라함에 의해서 형성된 이스라엘 백성의 배도와 타락, 그리고 예수 제자들의 출현, 제자들에 의해서 부흥했던 그리스도교가 후일에 타락한 결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 로마 가톨릭교회이고,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종교개혁자들의 프로테스탄트교회, 그리고 지금은 종교개혁의 여파로 발생한 개신교회조차   타락하면서 그 단진자 운동처럼 반복되는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개혁은 중세의 종교개혁으로 완성된 것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 ‘개혁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그동안 역사를 통하여 반복된 단진자 운동에 의하면, 지금은 어떤 주체에 의한 또 다른 의미의 개혁이 일어날 시기가 된 것이다. 종교개혁에 의하여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리나 신조가 완성되었다면, 이제 우리가 기대하는 개혁은 그 바로 세워진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나타나게 되는 신앙의 개혁, 혹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개혁이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1) 중세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그 배경의 역사,  (2)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 (3) 당면한 제2의 종교개혁의 과제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성경에 나타난 이분법적 개념
성경의 내용 전체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역(使役)과 그 구속의 역사를 방해하는 사탄의 궤계가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투쟁의 역사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선(善)과 사탄의 악(惡)이라고 하는 두 개의 큰 축이 성경 전체의 흐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선’은 의(義), 사랑, 구원, 알곡, 양(羊), 성령 등의 용어들과 함께 한 꾸러미를 이루고 있고, 사탄에게 속한 ‘악’은 불의(不義) 혹은 불법, 미움, 멸망, 쭉정이, 염소, 악령 등의 요소들로 또 다른 하나의 꾸러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23). 이러한 이분법적 논리를 대표할만한 중요한 대립 용어 중의 하나는 ‘빛’과 ‘어두움’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사울을 불러내어 그의 사도로 삼으시면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사명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행 26:18) 하는 것이었다. 후에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살전 5:5)한다고 언급하면서 ‘빛’과 ‘어두움’의 개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이분법적 논리에 의하면, 개혁이란 ‘어두움’ 속으로 ‘빛’이 들어가는 것이고, 그 빛이 간직하고 있는 열기에 의해서 주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빛을 싫어하는 어두움의 속성 때문에 빛과 어두움이 충돌하면 투쟁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어두움의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요 3:19)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개혁의 참 의미는 ‘빛’을 따라 사는 것
성경에서 ‘빛’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창세기 1장의 창조 시에 나타나는 빛은 물리적 빛을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물리적 빛 속에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다. 태양에서 발산되는 빛에는 식물을 자라게 하는 생명력이 있다. 그래서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를 ‘빛’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인 성경도 ‘빛’이라고 하였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어두움에서 불려 나와서 빛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빛을 따라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빛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 의미가 명백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에 그 빛을 유지할 수 있고 어두움이 침범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타락과 부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진 신자들이나 교회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된 인간의 속성을 따라서 살기 때문에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는 언제나 죄악의 세력이 크고 강력하다. 이러한 연유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어두움의 세월이 훨씬 깊고 길었고, 빛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오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예수를 몰라보고 싫어하였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그래서 빛 즉 말씀의 능력에 의한 의로운 힘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어두움이 즉시로 대결하여 싸워서 그 힘을 소멸시키려 하기 때문에 이 죄악 세상에서 ‘개혁’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투쟁과 피흘림이 없이는 개혁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 인간 사회의 실상이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역사는 “말씀이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의해서 그 운명이 결정되어 왔다.
필자는 이번 종교개혁 특집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이 인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기독교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여 부활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진리’가 승리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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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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