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을 직접 본 사람은 없다. 다만 성경에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현대인들은 천재지변만을 보고 살아서 그런지 ‘저절로’라는 말에는 아주 익숙해져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고 온몸으로 감탄만 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장 20절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은 우주 만물을 보면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고 하셨지만 더듬어 볼 문장을 지금까지 찾지는 못하였으나 필자는 이신칭의 생활문화를 보급과정에서 찾았다.
바로 자연(自然)과 자기(自己)라는 한자의 형상이 그것이다. 코를 상형화한 ‘스스로 자(自)’자이며 고한글이다. 옛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자연(自然)이라는 단어에 새겨 놓았다.
하나님은 오늘의 이 순간을 미리 예견하시고 로마서 1장 20절을 말씀하신 것만 같다. 창조 현장을 직접보지 못한 인간들을 위하여 누구나 말씀의 진리를 더듬어 보도록 한 말이 로마서 1장 20절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 할지니라”.
인간과 자연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성경 곳곳에 기록이 있지만,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적당히 넘기려는 사람들의 본성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自然)의 ‘自’(자)자와 자기(自己)의 자(自)자를 똑같은 글자로 쓰면서도 왜 ! 똑같은 자자를 쓰는지 알려고 들지도 않았고 남들이 쓰니 그냥 따라만 했다. 성경과 일상생활과 연관시키지 못했던 것은 한자는 무조건 유 불교라는 고정관념도 강했지만 더 큰 문제는 유교적 폐쇄성이다. 성리학(性理學)이외의 다른 종교와 이념은 무조건 이단시하고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다른 시도(試圖)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성리학의 잔재가 생활에 남아있어 신앙의 장애물이 된다.
뜻밖에도 하나님은 시 공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통로로 자연(自然)이란 고한글의 自(자)자로 열어놓으셨다. 自(자)자는 ‘저절로’와 ‘스스로’ 둘이지만 실은 동일한 뜻이므로 하나의 문자를 공동으로 쓰는 것이다. 생명체는 ‘스스로’, 사물과 풍광(風光)은 “저절로”로 쓰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가 알기 쉽게 식별하고자 소리만 조금 달리 낼뿐이다. 뜻과 글자가 똑같은 동일한 고한글이다.
또한 自(자)자의 형성 과정도 역시 하나님 창조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를 확실하게 뒷받침 하는 것은 창세기 2장 7절이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먼저 창조하시고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바로 생명이 들어간 코를 형상화 한 상용문자가 바로 自(자)자인 것이다. 중국의 허신도 설문해자에서 분명히 사람의 코를 형상화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자연공간의 순리와 아담과 하와, 생활까지를 하나로 묶어서 더듬어 볼 수 있도록 한 문자가 바로 自(자)자가 아닌가? 또한 중국의 문헌과 역사에 까지 기록을 남겼으니 객관성까지 더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스스로’(출3:14)와 ‘저절로’(겔44:31, 행12;10)를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도 하나님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더듬어 알도록 한 것이 로마서 1장 20절 말씀이다. 제 아무리 인공지능의 최첨단기술이라고 할지라도 수 천 수 만년 전의 일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밝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못 깨우치다보니 때로는 당황도 하고 의심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제대로 성경을 삶으로 살아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신칭의(以信稱義) 생활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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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성 만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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