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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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베이비붐 세대입니다. 전후 생존자들이 전쟁의 후유증을 딛고 일상의 안정을 되찾자, 사람들은 다산(多産)을 통하여 친인척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려 하였지요. 그래서인지 베이비붐 세대들은 온순하고 여유있고 성실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60년대의 보릿고개를 겪으며 생존 의지를 불태웠고, 70년대 고도 경제 성장 시대에는 아랍의 사막으로 달려가 외화 벌이를 하였으며, 80년대에는 민주 사회를 위하여 저돌적인 민주화 담론을 부르짖었고, 90년대엔 일상에 관심을 가지며 근대화의 토대를 쌓았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인터넷을 통하여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인륜을 쌓았습니다. 2010년대가 되니 그 세대가 은퇴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은퇴를 하여 보니, 처음 찾아온 것은 앞치마였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전동차를 타고 오면서 만 원에 두 개 짜리 앞치마를 사 왔습니다. 하나는 군청색, 다른 하나는 빨간색. 설거지를 하다 보면 물이 튈 테니 앞치마를 두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나는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고 속으로 되뇌어 보았습니다. 삼십여 년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가정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게 뭐람. 날이 갈수록 아내의 압박은 은밀히 가속되었습니다. 아내는 세탁기 조작법을 알려 주며 직접 실습을 해 보라 하였습니다(이건 절대 고자질하는 게 아님). 건조대에 빨래를 널 때에는 옷을 탁탁 털어서 널어야 했고, 그릇들을 비누칠한 후 수돗물을 틀어 자연스럽게 씻기게 하면서 설거지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나마 청소는 진공 청소기가 있어 수월한 편이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유리창을 닦고 욕실 등을 대청소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도 그리 힘들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무엇도 못하랴 하는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같은 사랑을 일찍이 알지 못하였더라면, 아마 나는 가족들에게 짜증을 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주님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 고통도 마다 하지 않으셨는데, 가족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못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가사(家事)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내의 기세는 더 높아만 갔습니다. 젊은 날 신랑의 밥상을 들여오며 “이것 좀 드셔 보세요.” 하던 아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심지어 가사(家事)를 땀이 나도록 하는데도, 아내는 성에 안 찬 지 잔소리를 늘어 놓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 아내는 가정에서 한 국가의 왕비처럼 굴었고, 성년이 된 아이들도 아내 말을 더 잘 듣는 편이었습니다. 어, 이거 봐라. 나는 전세를 역전시킬 준비를 아니한 바도 아니었습니다. 명절이 되어 아내와 큰집에 가게 되었을 때, 나는 형님을 따로 뵙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형님. 여자가 나이가 들자 남편 앞에서 기세 등등해지는 것은 왜 그러지요?”
형님은 형수씨와 아내에게 들리지 않게 조곤조곤히 말하였습니다.
“그건 여자가 폐경기가 지나면 남성 호르몬이 많이 생겨서 그런 거다. 그럴 때는 아내 앞에 바싹 엎드려야 한다.”
그러고 보니, 형님도 요즘 형수씨 앞에서 바싹 엎드려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에 두 번 집안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깨끗이 하는 데도, 형수씨는 시동생 앞에서도 형이 나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과감히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야, 남자들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지. 예전엔 안 그랬는데.
내가 젊었을 적에, 어머니가 아버지가 퇴근하면 해 드려야 한다고 해삼을 수돗가에 있는 양푼 물에 담가 놓는 것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던 나는, 요즘 세태가 왜 이렇게 변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여권 상승을 세계 곳곳에서 주장하고,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에는 공무원의 여성 비율을 더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주변의 가정을 돌아보면 이미 대세는 여성 우위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남성들이 양성 평등을 주장하며 여성에게 짓눌린 기를 펴려고 하는 현상까지 보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니까요. 주님은 당신이 돌아가신 줄 알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에게 동행하셨고, 주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베드로에게 나타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으며, 기독교 박해의 길을 걷고 있던 바울에게 임하셔서 사도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주님! 주변을 돌아 보면 가정에서 기 죽은 남성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한때 산업 현장에서 조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였고, 불의를 민주화의 열기로 물리쳤습니다. 이제 이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정을 허락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행복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니, 가정에서 가족애로 행복을 느끼게 하여 주십시오. 이 참에 주 앞에서 고백해 봅니다. 여보. 사랑해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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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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