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5월 월례회 ‘내가 사랑하고 돌보는 어린이들’ 중 양승헌 목사의 발제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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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1월 2일 주일학교 교사로 임명을 받은 후 45년 5개월이 지났다.
어린이 사역이 핵심은 “스토리 잇기”이다. 우리의 복된 믿음의 대물림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그 소명의 본질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신신당부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스토리를 다음세대에게 물려주는 일에 실패하였다.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나고 말았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사사기2:10)
다른 사람 이야기만이 아니고, 모세 자신의 가문에서도 그 일이 일어났다.
스토리가 끊어진 일이 뭐 그리 심각한 일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다. 스토리가 끊어지는 것은 단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백성이 믿음의 스토리를 잃어버릴 때, 그 자신, 그 가문, 그 민족 전체가 어둡고 슬픈 역사 속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 직접적인 증거다. 강돈욱장로, 그의 딸 강반석, 그의 사위 김형직이 그들 앞에 자라는 김일성 속에 조국의 미래가 들어있다는 조그만 시각만 있었다고 해도, 그들이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스토리를 확실히 심어주기만 했어도 우리 민족사는 아주 다르게 흘렀을 것이다. 김정은이 이끄는 북한 공산 세력을 보며 어린이 사역자가 얼마나 무서운 책임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어린이 사역45년은 내게 긍지나 보람의 세월이라기보다는 좌절감과 답답함이 더 많은 세월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어린이 사역이 즉각 열매를 볼 수 없는 양묘(양묘)사역이거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무대 뒤 사역임을 몰라서가 아니다. 소중한 소명에 대한 부담감, 한 아이가 세상과 역사에 미칠 끝이 보이지 않는 영향력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나 자신이 이 일을 감당하기에는 한없이 모자라는 미달감이 내 의식의 뿌리를 누르고 있다.
게다가 눈으로 보는 현실 속에서 내 사역이 정말 의미는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과 회의도 날 괴롭혀왔다. 유럽의 그 좋은 교회들이 다음 세대에게 믿음의 스토리 대물림에 실패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는 마음이 거북하다. 그 선대의 주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증거물인 예배당은 술집과 나이트클럽, 심지어 이방 종교의 신전으로 팔려나가고 있지 않는가?
이런 일들은 더 이상 바다건너 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선배님들이 순교로 세우고 지켜온 교회는 지금 세속화의 쓰나미를 견디지 못하고 흔들거리고 있다. 주일학생 4명 중에 1명은 결석을 하고, 2명 중에 1명은 지각을 한다. 시험기간만 되면 중학생의 절반이, 고등학생의 삼분의 일이 교회를 제쳐두고 학원으로 간다. 마음으로 몸으로 교회를 등지고 떠나는 한국교회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더욱 염려가 생긴다. 한국교회 통계가 드러내듯이 이미 한국교회 절반은 주일학교가 없어진 상태다. 흰개미(termite)가 파먹은 목조주택이 어느 날 푹 주저앉듯 우리 교회가 주저앉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고뇌와 갈등의 세월이 어린이 사역자로서 내 삶과 사역의 열정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긴 사역기간 나는 전문가로 자랐다. 뭘 잘한다거나 안다는 전문성이라기보다는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를 많이 경험했다는 점에서의 전문성이다. 우리 교회와 가정이 스토리를 제대로 이어주기 위해, 아니 쪽풀에서 나왔지만 쪽풀보다 푸르다는 청출어람의 믿음의 세대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가 이제 조금 정리되는 듯 싶다.
1. 어린이 사역은 아이 교육(pedagogy)이 아닌 어른 교육(andragogy)이 그 초점이어야 한다. 정말 어린이들이 좋은 믿음의 세대로 세워지길 원한다면, 부모가 바른 믿음, 삶의 바른 원리, 바른 삶의 모본을 세우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성숙한 양질의 주일학교 교사를 세우고 관리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신앙공동체의 다음세대에 대한 바른 시각이 세워져야 한다.
2. 어린이 사역이 벌어지는 참 현장은 교회가 아닌 가정이 되어야 한다. 신구약을 통해 자녀에 대한 신앙훈련의 책임의 1번지는 가정과 부모다. 그러나 모든 가정 모든 부모에게 그런 역량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교회는 제2의 가정, 주일학교 교사는 제2의 부모로서의 소중한 책임을 갖는다. 가정을 도외시하거나, 교회를 떠나서 참 신앙의 대물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의 진리라는 노란색 에너지와 가정의 사랑이라는 빨간색 에너지가 합쳐진 오렌지 에너지를 창출될 때 어린이 사역은 그 열매를 확실하게 거둘 수 있다.
3. 어린이 사역은 성경의 지식을 가르치는 사역이 아니라, 성경으로 어린이의 신앙 인격적 나무꼴을 잡아주는 사역이다. 성경은 사람을 위해 주어진 책이다. 주의 말씀으로 사람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함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바로 그 사람(imago Dei)를 회복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딤후3:16). 우리 사역의 목표는 지식 축적이 아니라 “작은 예수”로서의 인격의 변화이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과 삶의 정확 무오하고 유일한 표준이다. 성경을 데이터만이 아닌 필터, 표준으로 삼아야만 전인격적인 삶의 통합이 발생된다.
4. 어린이 사역은 학교가 아닌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일어난다. 주일학교는 예수님이 만든 기관이 아니다. 1780년 영국의 로버트레이크스(Robert Raikes)가 산업혁명의 후유증으로 인해 버려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만든 사회적 기관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교회 확장의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교회 안에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고, 그래서 선교사들의 손에 들려 우리에게까지 이른 기관이다. 교회의 교육을 위해 교회가 입양한 기관이다. 문제는 교회가 왜 학교가 되어야 하는데 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500년부터 학교는 지중해 지역의 대표적 교육기관으로 꽃피고 있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 효율적인 기관을 세우시지도 활용하지도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사람이 지식과 정보에 의해 변화되는 존재가 아님을 아셨다. 사람은 사람의 만남과 교통 속에서 변화된다. 교회를 학교로 만들지 말고, 하늘 가족 공동체로 만들어가야만 한다. 교회에서 평생의 멘토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도록 해주어야 한다.
5. 어린이 사역은 전 생애라는 발달과정의 틀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각 부서의 전도사들이 자신의 소신에 옳은 대로 사역을 수행함으로 마치 그 부서를 졸업하면 소천할 사람을 키우듯 위 아래 부서 사이의 긴밀하고 유기적인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학교틀(schooling)의 영향으로 생긴 부작용이다. 가정에서는 결코 그런 식으로 자식을 키우지 않는다. 부모는 아이의 전 생애라는 과정의 맥락안에서 자녀를 키운다. 교회의 효과적인 어린이 사역을 위해 전임 교회교육 디렉터(Director of Christian Education)가 세워져야 한다.
6. 어린이 사역이 정말 스토리를 다음 세대에게 대물림하는 사역으로 꽃피려면, 교육-목회, 다음세대-장년, 교회-가정의 분리의 틀을 깨고, 통합의 틀로 틀이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어린이들은 주일학교에서 교회 공동체의 영광과 다이나믹을 배우지 못하고 자라고 있다. 아이들은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그들은 예배의 다이나믹도 모른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끈끈한 사랑의 공동체인지를 맛볼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들은 교회의 2등급 교인일 뿐이다. 그들은 그저 다른 종류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일 뿐이다. 주일학교 한 부서를 마치고 올라갈 때마다 많은 아이들이 떨어져 나가는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가능한 많이 아이들이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영광과 책임을 경험하도록 포함시켜야 한다.
인구 1억 이집트에는 1천만의 크리스천이 있다. 이들을 우리는 콥틱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지난 1600년 동안 혹독한 이슬람교도들의 핍박 아래서도 그들은 믿음의 대물림을 확실하게 해오고 있다. 나는 이들로부터 어린이 사역의 좋은 모델을 찾았다.
첫째는 3세기경에 그들 말로 번역된 성경을 갖게 되었다는 점. 아이들이 그들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이 정확하고 적실하게 가르쳐져야 한다.
둘째는 부모들이 그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 아이가 태어나면 먼저 기독교식 이름을 지어주고 오른 쪽 팔 목 안쪽에 십자가 문신을 새겨넣는다. 그 이름과 그 문신이 그 아이의 생애 내내 얼마나 큰 핍박과 멸시와 고난을 초래할 것인지를 잘 알면서도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한다.
셋째는 공동체가 함께 영적인 공동 육아 공동체가 되어 준다는 점. 아이들이 태어나면 공동체는 그 아기에게 유아세례를 베푼다. 그 아기가 공동체의 일원이며, 함께 고난과 영광을 나누게 될 삶을 가르치고 격려하게 될 울타리가 되어준다. 이들 공동체가 갖고 있는 믿음의 대물림의 열정을 우리가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한국교회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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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복협 5월 월례회 ‘내가 사랑하고 돌보는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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