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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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자 이 땅에 예수님으로 찾아 오시어 그의 장막을 펴셨다고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예수께서 그의 첫 기적으로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첫번째의 기적인 만큼 우리는 그 기적에 대한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마다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이 예수께서 행하신 첫 기적이기 때문에 마치 높은 공직을 맡은 사람이 그의 취임식에서 그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정책이나 사업을 발표하듯이 예수께서도 이 첫 기적을 통하여 앞으로 하고자 하는 그의 복음 사역의 성격을 예시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건이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이 사건은 첫째로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라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결혼 잔치 집에서 물이란 무색, 무미, 무취, 무용한 것이다. 그러나 포도주는 색깔이 있고, 맛이 있고, 냄새가 있고, 없어서는 안될 유용한 것이며, 마신 사람들의 마음을 유쾌하고 즐겁게 해주는 힘(dynamic force)이 있다. 예수께서는 물을 포도주 변화시키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분으로 물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포도주처럼 유용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신다. 따라서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라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는 혼인 잔치와 같은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혼인 잔치 집에는 사랑이 있고, 축복이 있고,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모든 것이 풍성하고 넘친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요, 축복의 종교요, 즐거움과 기쁨의 종교라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풍성하고 넘친다.
셋째로 기독교의 정결예법은 유대교의 정결예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돌 항아리에 담은 물로 매일 몸을 씻는 의식을 행함으로 자신들이 죄로부터 깨끗해지고 하나님 앞에 정결해진다고 믿지만, 예수님의 정결의식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내면의 변화를 통한 정결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마리아의 주인의식, 하인들의 적극적인 순종, 연회장의 역할 등을 통해서 우리 기독교의 특징적인 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해석이 다 일리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과연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설하기 위하여 이러한 기적을 행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복음서의 해석이 그렇듯이 요한이라는 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인가를 생각해볼 때, 우리는 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본문의 중심은 예수님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정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첫째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이다. 우리 인간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이적을 행하고 계신다. 따라서 그는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들과는 구별된 신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는 예수님은 이 혼인잔치 집에서 사실상 신랑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남녀가 결혼할 때에는 반드시 결혼 계약서를 써야 하고, 신랑은 결혼 잔치를 베풀어야 한다.1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진 이 잔치 집에서 정작 포도주를 내고 있는 사람은 신랑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 신랑 역할을 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신적 신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근동세계에서 잔치에는 포도주가 필수품이었다. 신랑은 신부의 아버지에게 신부값 (bridal price)을 지불하고, 결혼계약서를 쓰고,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결혼 잔치를 베푼다. 이때 신랑은 이웃 친지들 앞에서 “이제부터 이 여자는 내 아내이고, 나는 이 여자의 남편이다.”라는 결혼 선언을 한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신 후에 시내 산으로 데려와 언약을 맺는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언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아라. 그날이 오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새 언약을 맺을 것이니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굳게 잡고 이집트 땅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던 때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내가 그들의 남편이었으나 그들은 내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여호와의 말이다.”(렘 31:31-32).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시내 산 언약을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결혼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성경 곳곳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기술하고 묘사하고 있다(호 1-3장; 겔 16, 23장; 렘 3:8 등).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남편이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신부이다. 이러한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하나님은 이제 가나의 혼인 잔치 집의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요한은 예수님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믿고 따르던 그들의 신랑,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소개하고, 특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 신부로 그의 제자들, 성도들을 신부로 비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살아 생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요 15:4)라고 말씀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모두가 하나되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요 17:21)라고 기도하신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상호동거라는 신비한 관계를 갖기를 가르치시고, 기도하신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가 마치 결혼한 부부와 같은 인격적이고, 밀접하고, 거룩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성장해가는 것이 성도들의 삶이다. 예수님의 가나 혼인 잔치의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첫 기적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 손석태  「여호와 이스라엘의 남편」(서울:도서출판 솔로몬, 1997), 52 n8.  「목회를 위한 구약신학」(서울: CLC, 2006), 272, 287n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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