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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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신천군 출신
장성칠(張聖漆 1914~1986. 9. 17) 목사는 황해도 신천 출신이다. 그가 태어난 황해도 신천(信川)군은 서북쪽의 은율군, 북동쪽은 재령군, 남으로는 송학군과 벽성군이 인접해 지리적으로는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기독교복음이 평안도 다음으로 교세가 좋은 곳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미개한 지역이나 민족들에게 기독교복음이 전파된 곳은 일찍부터 신식문명에 접하는 기회가 되었고 무식한 백성들도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배우게 됨으로 마음이 열리고 머리가 깨어나 사리판단의 개념과 선악간의 개념을 바르게 인식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인간다운 새 세상이 보이게 되어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신천이란 곳은 한편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이 경성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경성으로 오르내리는 길목이 되어 일찍부터 전도자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었다. 신천읍 양장리에는 1911년 3월 15일 설립된 양장교회(良長敎會)가 있었고, 같은 읍 사직리에는 1933년 2월 18일 신천동부교회가 세워졌다. 이보다 앞서 1883년 5월 16일에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조선인에 의한 조선의 어머니교회로 소래(松川)교회가 서경조(徐京祚)에 의해 설립되었다(韓國基督敎史總覽, 이찬영 편, 所望社 1994 서울 초판 p.937~943 참조).
그의 소년 시절에 이미 신천지역만 아니라 황해도에 한 노회가 조직될 만큼 황해도 전지역에 이미 예수교회가 곳곳마다 설립되어 있어 기독교에 쉽게 접촉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교회 계통의 교육기관을 통해 교육을 받게 되었고, 선교사들의 권고로 숭실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숭실전문학교 영문과와 장로회신학교 졸업
황해노회서 목사안수 해방후 월남
황해도 신천 출신들이 세운 서대문교회 부임
경신중·고등학교 교목 및 한성신학교 교장 역임
고려측 및 통합측과 ‘합동’ 논의

장성칠 청년은 기독교를 신봉하면서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계적인 언어로 영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를 배우며 영어성경을 접하게 되고 도서관에서 외국어로 된 주석이나 기독교관계 서적을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소명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활동만 아니라 복음 증거자로써 지도자의 자질을 쌓아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숭실전문학교를 고학을 하며 졸업하자마자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3년동안 신학을 이수하고 본교단 총회장을 역임한 이환수 목사(47회), 문재구 목사(54회)와 함께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1943년 제38회로  졸업하였다.
그는 이듬해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사역을 시작하였다. 그 사이 전쟁이 끝나고 광복이(1945. 8. 15) 찾아 왔으나 북쪽에는 민주(民主)와 공산(共産)이라는 좌우 이념의 대립이 심화되어 가고 있을 즈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슬픈 일이었다.
36년 동안 일제의 강점으로 언어도, 정치도, 산업도 다 앗아간 일본이 패전으로 연합군에 항복하게 되어 광복을 맞이했는데, 좌우대립으로 해방정국은 점점 혼란만 계속되었다. 선거가 주일에 공공연히 시행되고 뜻있는 신앙인들은 하나 둘 3.8선을 넘어 월남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 김경하 목사와 신천읍에 살던 교인들과 함께 대한민국 서울로 남하하였다.
서대문교회(西大門敎會)가 형성하게 된 배경을 잠시 언급해 보면, 공산주의 정권이 득세하던 북한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황해도 신천읍 서부교회(장연군 장연면 서부리 소재) 교인들이 남하해 1949년 1월 서울 서대문구 교북동 100번지에 있는 적산가옥에서 첫 주일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된 이 연약한 교회는 당시 서대문 영천에 있었던 서대문형무소(현, 안양교도소) 교무과장으로 있던 박상건 목사가 설교를 담당하였으며, 얼마간 기간이 지난 후 ‘인수학원’을 빌려서 교회를 이전한 후 조동진 전도사를 초청하여 설교와 심방사역을 하게 하였다.
이러던 중 1949년 8월 월남해 대구 침산교회에서 목회하던 고향 출신 김경하 목사를 청빙하였다.
여러번 예배처소를 이전하던 교인들은 교회 자체 건물을 마련하기 위해 서대문 일대를 찾아다니다가 송월동(松月洞)112-2번지에 있던 일본인 기독교인들의 자녀들이 사용하던 기숙사 건물을 매입해 수리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예배당 뒷마당에는 높은 종탑을 세우고 매일 새벽기도회부터 종을 쳐서 서대문 일대에 은혜의 찬송소리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황해도 신천읍에 살던 교인들을 중심으로 황해도 신자들이 교회를 새로 설립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황해도 사람들과 인근의 장로교인들이 모여들어 교회가 날로 부흥하였다(거목들의 행진, 서대문교회 60년사, 이계홍 편, 서대문교회 간행 2009 서울, p.24, 28 참조).
서대문교회 연혁(2017. 1 간행)에 보면, 1954년 5월부터 2개월간 송월동 112의 55호에 총경비 127만원을 들여 목조와 가 단층 55평 예배당을 신축하였다고 기록하고, 1960년 5월 제1대 당회장 김경하(金慶河) 목사가 사임하고 후임으로 장성칠 목사가 부임하다라고 적고 있다(서대문교회 2017년도 요람 p.9 참조).
교회는 임시로 조직을 갖추기로 하고 북에서 장로로 섬겼던 사람들인 김도측, 이춘화, 한철수, 김명원, 박태환, 문성훈 등과 함께 당회를 조직해 교회다운 면목으로 일신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18일 6명의 장로 취임식을 거행하였는데 바로 1주일 후 6.25전쟁이 발발했다.
서울을 빼앗긴 기간동안 뿔뿔이 흩어졌던 교인들이 9.28 수복으로 다시 교회에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다. 예배당을 수축하고 재건하는데 열심을 내던 교인들은 그해 겨울 중공군의 개입으로 눈물을 머금고 다시 예배당을 뒤로하고 피난을 갔다. 1953년 공산군이 퇴각하고 다시 서울이 수복되자 교인들이 돌아와 다시 교회문을 열었다. 당시 서울에 있는 교회 가운데 피난 갔다가 돌아와 제일 먼저 문을 열고 예배드리기 시작한 교회가 서대문교회였다(같은  책, 거목들의 행진, 이계홍 편 p.32).
1960년 11월에 부임한 장성칠 목사는 1963년 6월 18일 새예배당 신축 기공식을 갖고 이듬해 5월 7일 창립 15주년 기념 및 헌당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72년 3월 9일 미국으로 가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1974년 5월 27일 교회설립 25주년 기념예배를 드렸고, 이듬해 7월 31일 교육관을 완공하였다.
그 사이에 장성칠 목사는 경신 중고등학교 교목과 경기노회 노회장, 경기노회 직영 한성신학교 교장 겸 교수를 역임하며 두루두루 교회 행정면에도 경륜을 쌓아갔다.
드디어 1975년 25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60회 총회에서 그의 덕망과 목회사역과 교단을 위한 수고를 인정받아 교단의 수장자리인 명예로운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엄격하고 부리부리한 호상(虎像)으로 생겼지만, 자상하고 부드러운 전형적인 목자상이었다.
1975년 11월 8일 장성칠 목사 성역 37주년 및 서대문교회 시무 15주년 및 교육관 헌당식을 가졌다. 1979년 9월 3일 교회설립 30주년 기념사업으로 ‘한국음악신학교’를 개교하였고, 1980년 11월 교회본당을 증축하기로 하였다. 당시의 교세는 장청유년을 합해 5000명이 넘었다. 중형교회의 발판이 되었다.
1984년 5월 31일 연건평 598평 대성전이 완공, 교회설립 35년만의 대사였다. 장성칠 목사는 목회사역을 마치고 명예로운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서울노회로부터는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퇴임후 2년 후 1986년 9월 17일 주님의 부름을 받아 가족들과 사랑하는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영면하였다. 그의 천국 환송예배는 총회장(葬)으로 치루어졌으며 그의 유해는 서대문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재직했던 예장총회 제60회기의 결의안을 요약해 보면, ① 목사 인식년제도를 실시키로 하다. ② 한남노회 분립을 허락하다(한남노회·남서울노회로) ③ 전북노회 분립을 허락하다(전주노회·동전주노회·북전주노회) ④ 조직당회로 있을 때에 합법적으로 청원되어 노회가 위임을 하였으면 폐당회가 되었다 해도 그 목사의 위임은 해제되지 않으나 2년 내에 당회가 복구되지 않으면 자동위임이 해제된다. ⑤ 미주 중부노회를 조직하다.  ⑥ 일만교회운동은 추인하고 적극 추진하기로 하다 ⑦ 고려측과 합동문제는 시기를 보아 추진키로 하고, 통합측과는 이미 합동원칙을 세운 바 그 조건이 가하면 합동키로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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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제60회 총회장 장성칠(張聖漆)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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