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

19. 경건한 개혁자 후스와 동역자 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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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세기 경 보헤미아(현재의 체코 서부와 중부)에 개혁적 복음이 들어갔다. 그리고 보헤미야에서는 비교적 선교가 순조롭고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권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보헤미아에도 어두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보헤미아어로 예배드리는 것을 금지시키는 교서를 내렸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신다. 이 법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악과 이단이 생기게 되었다.”(-Wyile, b. 3, ch.1)는 것이 교서의 골자이다. 이 내용은 당시 교황권의 권세와 횡포를 대변하는 단면이기도 하다. 종교의 탈을 쓰고 정치적 권력으로 인간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가톨릭교의 전횡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상식적, 비과학적, 비인간적이었다. 이러한 시대가 거의 일천년 이상 계속되었으니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부패와 이에 따른 그 폐해(弊害)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후스의 출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거주하던 왈덴스인들과 알비젠스인들이 종교적 박해를 견디다 못해 좀 더 자유로운 곳을 찾아서 보헤미아로 이주하여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개혁적 가르침과 분위기가 이미 보헤미아에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비행과 백성들의 타락상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규탄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수도사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과 활동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그들을 격렬하게 핍박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숲속과 산속으로 피신하여 예배를 드렸다. 군사들은 그곳에까지 추격하여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1372(?)년, 남 보헤미아의 후시네쯔라는 시골 마을에 얀 후스(John Huss)라는 인물이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경건한 신앙을 가진 어머니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지만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고자 좀 더 큰 도시(프라하)로 이주하여 프라하대학에 입학시켰다. 후스는 학업에 있어서 탁월한 면모를 보였을 뿐 아니라, 그의 생활이 깨끗하고 성품은 온유하면서도 쾌활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고 좋아하였다. 또 한편으로 그는 로마교를 열렬히 신봉하는 교회에 충성된 사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부가 된 후스는 그의 뛰어난 실력과 고매한 인품 때문에 신속히 승진하여, 왕실 전속 승정이 되었고, 모교의 교수를 거쳐서 그 대학의 총장까지 되었다. 동시에 그는 성직을 시작한 지 수년 후에 베들레헴 회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어 정기적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개혁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후스의 개혁사업
후스에게 개혁의 불을 붙였던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영국에서 어떤 학식 있는 설교자이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 두 사람이 프라하에 왔다. 그들은 교황을 정면으로 대적하였기 때문에, 당국으로부터 발언을 금지당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황의 비리와 부패를 지적하는 두 장의 그림을 그려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무언의 설교를 시작하였다. 하나는, 겸손한 모습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있는 예수님을 초라한 복장을 한 제자들이 따라가고 있는 그림이고, 또 한 그림은 교황이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 삼층 면류관을 쓰고 요란스럽게 장식한 말을 타고, 앞에는 나팔수들이 뒤에는 역시 사치스러운 복장을 한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따라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의미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달았고, 그 그림의 영향력은 프라하의 주민들에게 신속히 퍼져나가서 그야말로 프라하에 대소동이 일어났다. 후스도 이 그림에 큰 감동과 깊은 영향을 받았다.
후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민한 식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비록 교회에 충성하는 신부이기는 하였으나, 가톨릭교의 비성서적인 교리나 가르침과 의식들에게 대하여는 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정직한 양심을 가졌던 후스는 교회의 그러한 비리들과 오류들, 그리고 부패한 타락상들을 지적하여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는 로마 가톨릭교에 저항하고 교황을 대적하는 개혁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후스는 가톨릭교의 이교적인 의식들과 미신적인 교리들과 성직자와 신도들의 부패와 타락상에 대하여 과감하게 개혁을 주장하였다. 교마교 지도자들의 오만하고 부패한 생활에 비하여 후스의 삶은 매우 순결하고 경건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후스의 편에 가담하였고 그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후스의 동역자 제롬과 두 사람의 최후
후스의 이러한 개혁사업이 진행되는 중에 영국에 체류하면서 위클리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제롬이 보헤미아로 와서 후스와 합류하게 되었다. 제롬은 매우 대중적인 인물이었고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언변과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의 역동적인 사역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교의 오류와 비리를 깨닫게 되었고 참된 진리의 빛을 받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개혁자들을 통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진리의 빛을 드러내 주셨고 그들을 개혁의 길로 인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권세과 교권이 이들의 활동을 방치할 리가 없었다. 후스는 당시 교황 요한 23세가 이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소집한 콘스탄스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후스는 그 회의석상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확고부동한 입장을 주장하였으며, 그곳에 참석한 교회의 지도자들과 정부의 고관들 앞에서 교권의 부패를 거침없이 규탄하였다. 마침내, 후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성서적 교리를 취소하든지 화형을 당하든지 선택해야 할 마지막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는 주저 없이 순교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화형대의 불을 지피기 직전 다시 한 번 후스는 자신의 오류를 취소하면 살려주겠다는 권고를 받았다. 후스는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술한 것과 전파한 것은 모두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저술하고 전파한 진리를 나의 피로써 확인하기를 매우 기뻐한다.”고 외치면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후스의 뒤를 이어 개혁 사업을 하던 제롬도 역시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약 1년을 감옥에서 지나는 동안 제롬은 몸이 쇠약해지고 마음도 함께 약해져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 후, 제롬은 후스의 뒤를 이어 순교하기로 작정을 하고, 주교들에게 지난 번에 했던 말을 취소한 다음 그들의 비행과 만행을 지적하면서, “나는 다만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내 생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불의한 선고를 하지 않도록 너희들에게 권고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보다 너희들을 위한 것”이라고 외쳤다. 화형장으로 끌려 간 제롬은 사형집행자가 자기 뒤에서 불을 붙이려고 하자 “꺼릴 것 없이 앞으로 나와서 나의 눈앞에서 불을 붙여라. 내가 두려워했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면서 화형장의 잿가루로 사라졌다. 많은 개혁자들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순교를 당하였으나 그들이 전파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보여준 그들의 영광스러운 광채는 소멸될 수 없었다. 악한 자들이 그들의 목숨은 빼앗아 갔으나 그들이 밝혀놓은 진리의 빛은 꺼지지 않은 채 후세대로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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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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