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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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을 안고 사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다시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고, 다시 한번 그때 그 시절로 돌아 가고 싶은 추억이 있다. 그래서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시를 쓰고, 노래를 한다. 추억이 있고, 사모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을 퐁요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영영토록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는 상처가 아무리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할 지라도,  무엇인가  한줄기 마음 구석에서 피어 오르는 그리움이라는 것은 없을 수 없다. 성전을 그리워하며 쓴 시편 84편은 우리들의 가슴을 찡하게 하고 눈물이 핑 돌게 한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전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갈망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심신이 녹아 내려버릴 것 같이 지쳐 있다. 병이 날 지경에 이른 것 같다. 흔히들 순례자의 노래로 알려진 이 시는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시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매 연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4), 그 마음에 시온으로 가는 대로가 있는 자(5),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12)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4절씩 3개의 연으로 구성되며,”셀라” 라는 연주 기호로 각 연을 나누고 있다.
이 시의 시작은  그의 영혼이 그의 왕이신 여호와의 궁전을 사모하여 기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상사병이 걸린 사람 같다.  주의 궁전은 심지어 참새나 제비들도 집을 얻고, 둥지를 틀고 새끼들을 낳아 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들의 노래와 더불어 주의 전에 사는 자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주의 전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행복을 맛보고 살기를 갈망하는것이다.
둘째 연은 역시 복이 주제이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전은 시온에 있다. 대로는 고속도로를 의미한다. 마음 속에 여호와께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항상 그 마음이 여호와께로 향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바카 골짜기와 같은 곳을 지날지라도 여호와께 대한 그리움 때문에 오히려 더 힘을 얻고, 결국에는 여호와를 만나 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카 골짜기”란 말의 “바카”()라는 말은 “뽕나무” 혹은 “뽕나무 열매 오디”를 의미하기도 하고, “눈물” “혹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명으로서의 “바카 골짜기”라기 보다는 여러 역본들은 시어로 “눈물 골찌기”라고 지명을 번역한다. 순례자에게 사막이나 광야를 지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 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오히려 이러한 눈문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마치 가을 비나 오아시스의 샘과 같이 풍부한 물과 쉼을 공급하여 순례자에게 힘을 주어, 결국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움이 온갖 역경을 이기게 한다는 것이다.
셋째 연은 드디어 성전에 도착하여 주의 품에 안긴 행복감을 노래하고 있다. 성전에서의 문지기로 하루 사는 것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호의호식하며 천 날을 사는 것보다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태양이시고, 방패이시며, 은혜와 영광을 주시며, 그를 신뢰하는 자에게 복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대 근동세계의 문헌, 곧 우가릿 문서, 아마르나의 편지, 아시리아의 왕들의 역대기 등과 달리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태양으로 묘사는 곳은 많지 않다. 태양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과 셰계관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피조물과 동격으로 여호와는 나의 태양이요 방패라는 말 보다는 방패에 대한 수식어로  번역하는 곳도 있다. 태양의 힘과 역할은 모든 피조물을 능가하는 권위와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New English Translation ?은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지고의 보호자이시니니(For the Lord God is sovereign protector)라고 번역하고 있다. 열대지방에서 주님의 성전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에게 태양은 오히려 불가항력의 방해꾼이다. 그러한 태양을 찬양하는 듯한 표현은 옳지 않다.
이 시인은 순례 길에서 여호와의 전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기대와 소망 때문에 어떤 역경이라도 물리치고 결국 여호와의 전에 이르러 여호와와 함께 거하는 문지기로 사는 단 하루라도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천 날보다 더 낫다는 고백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여호와 전이 없다. 예루살렘에 있던 여호와의 전은 1차로 바빌로나아 사람들이 파괴해버렸고(586 BC), 2차로는 로마 사람들이 산산이 진멸해 버렸다(AD 70).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언젠가는 가까운 장래에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이 재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정통파 유대인들이 그렇고, 기독교인들 가운데 세대주의자들이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  반면에 예루살렘 성전 대신 현대의 교회를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활동을 제사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목사는 제사장이며,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제물이라고 생각한다. 강단은 제단으로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꼭 신발을 벗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은 시를 쓴 시인은 성전을 그리워하고, 성전에 올라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육신이 쇠약할 정도인데, 우리는 과연 교회를 나가기 위하여 그러한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불행하게도 교회에는 제단이나 제물이나 제사장이 없다. 엄격하게 말하면 성전과 교회에는 서로 연속성이 없다.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성전이나 교회의 본질을 오해한 까닭이다.
성전의 원형은 성막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과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고 마치 남녀가 결혼하면 언약을 맺고  같이 동거에 들어가듯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그들과 동거하기 위하여 성막을 짓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성막을 대신하여 견고한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성막이나 성전은 다같이 예수님의 속죄를 나타내는 모형이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예수께서 실형으로 오심으로 더 이상 모형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몸으로 성전과 제물과 제사장이 되신  것이다(요한 2장).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성전을 사모해야 할 이유가 없다. 성전 되신 예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과 함께 동거하기를 열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 된 것이다(고후 6:16).  
따라서 우리가 사모하고 열망해야 할 성전은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살다보면 심지어 내 안에 계신 성령, 예수님을 잊고 의식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바카 골짜기를 지날 지라도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자 하는 간절함과 열망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자 힘을 써야 한다. 그래야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요 17:21). 요한 계시록을 보면 사도 요한은 위로부터 예루살렘이 임하는 것을 본다. 그런데 그 안에는 성전이 없었다. 그 이유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분과 어린  양께서 그 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다.”(계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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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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