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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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임실 출생
이기하(李起夏 1917.~1979) 목사는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임실군 둔남면은 군 중심지역이다. 둔남 북쪽은 임실군청 소재지 임실읍이고, 서쪽으로는 청웅면, 동쪽으로는 지사면과 산서면으로 연결된 평야지대이다. 먹고 살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은 곳이었으나 평민들의 생활상은 일제하 학정에 시달리던 때라 궁핍과 가난의 시절이어서 의식주 전반에 이르러 말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난 시기 또한 3.1독립운동 거사가 있던 전후의 정치·경제·사회 환경 또한 말이 아니었다.
부모들은 아들 기하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일제하 모든 국면이 조선인들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이다보니 기하 소년 역시 앞날이 밝을 수 없었다. 마을 서당에 제대로 다닐 형편도 되지 못했고, 군청 소재지인 임실읍에 있는 소학교에도 마음놓고 다닐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면 그럴 수록 기하 소년에겐 배우는 일에 목말라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기하는 천신만고 끝에 이리에 있는 이리농업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의 꿈은 나라의 피폐하고 있는 농업에 투신, 덴마크 같은 신진농업과 낙농의 꿈을  펼쳐 보고픈 꿈을 지니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기하는 이리농업학교를 졸업 한 후 그의 마음 속에 일제하에서도 조선인들의 계몽사업을 통해 근대화를 꿈꾸면서 조선인들의 정신과 신앙계몽을 위해 헌신했던 지도자 최용신(崔容信 1909~1936)과 같은 민족지도자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최용신은 원래 고향이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있는 감리교 계통의 협성여자신학교 농촌과에 재학하면서 농촌계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리농업학교 졸업 후 신진농업의 꿈꿔
최용신과 같은 농촌계몽에 관심, 한때 학교 서무과서 일해
김제중앙교회 장로 장립 후 총회신학교 입학
군산삼일교회서 목회, 군산노회장 등 교정 참여
바울신학교·전북신학교 이사장 역임

황예스터의 지도로 농촌운동 이론을 터득하면서 한편 황해도 수안에서 동료 김노득과 함께 3개월 동안 실제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1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농촌운동에 전념하기로 결심, 선교사 밀러(Rev. Miller. E. Hughs 密義斗 1877. 7. 18~1966. 6. 6)의 후원으로 파송단체는 YMCA 소속으로 하여 경기도 화성군 샘골에서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했다.
처음에는 야학으로 시작했으나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정식 교사(校舍)를 지어 교육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농촌 어린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교육내용은 문맹(文盲)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뿐 아니라 산술, 보건 및 농촌생활에 필요한 상식과 기술, 애국심과 자립심을 북돋우는 의식계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김활란(金活蘭) 등은 샘골에서의 최용신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 여러 방면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최용신은 1934년 일본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로 유학하여 공부하던 중 신병(身炳)으로 귀국, 샘골에서 휴양하면서 농촌계몽운동과 농촌교육을 계속하였으나 지병(장충첩증)의 악화로 사망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22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 p. 359 참조).
이기하 청년 역시 당시 시대적 여건이 앞뒤가 꽉막힌 절망 외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식민지의 조선사회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이와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파악해서인지 자신의 앞날의 꿈을 주님의 사역으로 심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농업학교를 막상 졸업한 기하에게는 전공과는 다른 금융계로 진출이 이루어졌고, 1944년 해방 직전 그의 나이 27세에 김제여고 서무과 직원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후에는 서무과장으로 진급이 되어 생활이 안정되는 듯했으나 뜻하지 않은 6.25 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이기하는 신앙생활을 게을지 하지 않은 결과로 6.25 전쟁 발발 1개월 전에 김제중앙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게 되자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친히 목격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쟁 중에 멀리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가 전세가 반전되고 사회가 점점 자리를 잡아 가던 무렵 1953년 7월 17일 정전의 소식을 듣게된다. 이를 계기로 지난 날의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서울 수복이 이루어지고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고 휴전과 더불어 그동안 문을 닫았던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전신)가 대구 서문교회에서 개교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대구로 가서 총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얼마 안되어 1953년 7월 휴전과 더불어 정부를 따라 서울남산 신궁터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기하 신학생도 학교와 함께 서울로 상경, 학교와는 거리가 좀 떨어진 마석에 가곡교회를 개척 설립해 목회 실습처로 삼으며 신학을 공부하는데 열정을 다하였다. 드디어 1957년 3월 총회신학교를 별과 6회로 졸업하고 고향 김제노회에서 감격적인 목사장립을 받았다.
목사가 된 후 첫 목회지가 연정교회(전북 김제시 연정동 587의 2 소재)였다. 그는 연정교회에서  만 7년동안 복음과 양떼를 위한여 젊음을 볼태웠다.  
1964년 군산삼일교회로 임지를 옮겨 16년 간을 성실을 다해 그곳에 목회의 뿌리를 내리고 열정을 다해 목회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교정(敎政) 활동으로는 군산노회장을 비롯 총회 전북대회장 총회인준신학교인 바울신학교 이사장 및 교수를 역임했고, 이어 전북신학교 이사장과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1976년 예장 제61회 총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었고, 이듬해 1979년 9월 22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사당동에 있는 본 총회신학교의 대강당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62회 총회에서 그의 지도력을 인정받아 교단의 수장의 자리인 총회장에 올랐다.
그가 재임했던 예장 제62회 총회의 중요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전국주일학교 교사를 위한 통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다. ② 한동노회를 동서울노회로 명칭 변경을 허락하다. ③ 카나다노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④ 총신교수는 타교단 신학교에 강의함을 금하기로 하다. ⑤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호칭함은 부당하다고 가결하다. ⑥ 성경을 성서라고 호칭하지 않기로 가결하다. ⑦ 미국 나성장로회신학교 설립을 인준하도록 가결하다. ⑧ 고시부원은 총회신학원을 졸업하고 목사된지 10년 이상 된 자로 한다. ⑨ 총회 전도부 산하에 부흥전도단을 두기로 하다(제100회 총회(회의결의)요람, 이승희 김창수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0. p. 26 참조).
이기하 총회장이 남긴 총회적인 큰 사역이 하나있다. 그것은 그의 재임시에 발의 오늘날까지 시행 발전하고 있는 주교교사 통신대학과 성경통신대학의 실현이다.
성경통신대학의 원래 시작은 1917년 소안론(Rev. Swallon William, 1865~1954) 선교사에 의해 평안남도에서 시작된 성경통신과를 개편, 1935년 총회교육부에 귀속시켰고, 1989년 제72회 총회 성경통신대학으로 개편 오늘에 이르렀다.
이 과정을 마치면 안수집사 피택시 노회 장로고시 자격이 주어져 인기가 있다. 신구약 문제집과 일반과목 문제집을 직접 작성 제출해 합격하면 된다. 이 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데에는 이기하 총회장의 지도력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제101회 총회보고서, 이승희 편, 예장총회 기획행정실 2106, p. 225~227).
이 제도는 총회가 교사와 제직을 위한 평신도훈련 교육과정으로 오늘까지 계속 발전되고 있다.
이기하 목사는 62세 수를 누리고 주님나라로 영민하였다. 그에게 여한이 있었다면 조선 농촌의 근대화를 위한 꿈이 시대적인 장애로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주님께서는 천국사역을 위해 당신의 종으로 불러 사용했으니 전화위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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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제62회 총회장 이기하(李起夏)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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