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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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음지에서 이루어진 큰 개혁운동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인류의 역사는 그 자유의지의 선택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진행과정이 극도의 죄악으로 점철되어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발생할 정도의 상황이 되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역사를 반전시키신다. 예를 들면, 노아 당시에 노아의 가족 외에는 모든 인간들이 극도로 타락하여 더 이상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에 개입하시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다음에 새 역사를 펼쳐 놓으셨다.
마찬가지 원리로, 종교암흑시대를 지나면서 성경의 모든 진리들이 왜곡되고 가리어져서 성경에서 제시하는 진리의 참 빛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곳저곳에서 종교개혁자들을 일으키셔서 무너진 진리를 수보하는 일에 착수하셨다. 프랑스의 왈덴스인들을 비롯하여 영국의 위클리프, 그리고 보헤미아의 후스와 제롬 등 유력한 개혁자들이 나타나 조만간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시작될 종교개혁의 불씨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재세례파의 출현
이와 같은 배경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거의 동시대에 스위스에서는 칼빈이 독일보다 더 구체적이고 철저한 개혁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외치는 일단의 무리들이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이 바로 ‘형제들’(Brethern)이라고 알려진 ‘재세례파’(Anabaptists)이다. 이 재세례파는 매우 구체적이고 파격적인 개혁사업을 진행하였다.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근거로 삼은 것은 물론이고, 정교분리를 엄격하게 주장하였다. 아직 죄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무효라고 주장하는 한 편,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인이 된 이후에 다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이들을 ‘재세례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그것은 수면과 같은 무의식 상태라고 가르치면서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재림을 강조하였다. 교회로부터 성상(聖像)들과 이교적 의식들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고, 핍박을 받을지라도 대항하거나 원수를 갚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고 놀라운 일은, 이들이 가톨릭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은 물론이지만, 기존의 오직 성경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루터나 쯔빙글리나 칼빈 등의 개혁세력에 의해서도 핍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개혁 내용은 결코 비성서적이거나 기존의 개혁 운동을 무시한 것도 아닌데, 더 진취적이고 더 구체적인 개혁을 이루어가는 이들에게 기존의 개혁 세력이 핍박을 가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메노나이트와 아미쉬
스위스에서 핍박이 점점 거세졌기 때문에 재세례파 신자들은 홀랜드(네델란드)으로 도피하게 되었다. 이 당시 재세례파 지도자 중에는 메노 시몬스(Menno Simmon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원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으나, 가톨릭 교리 중 화체설(化體說)에 의문을 품고 성경을 연구하다가 가톨릭의 오류를 깨닫고 1536년에 재침례파로 개종하였다. 시몬스는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면서 재세례파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성경상의 세족예식을 비롯하여 새로운 개혁의 분야를 넓혀갔는데 이러한 개혁에 동조한 사람들을 메노나이트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이들은 신대룩으로 이주하여 종교의 자유를 누리면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계속 강조하였고, 이들과 같은 계통으로 알려진 퀘이커 교도들과 함께 비무장 평화주의와 의료봉사를 통해서 미국의 민주사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현재에도 미국의 농촌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활동하고 있는 아미쉬도 스위스에서 발생한 재세례파의 일원이었던 암만(Jacob Amman)이라는 지도자에 의해서 더 순수하고 자연친화적인 개혁을 시도한 결과로 나타난 개혁파의 한 줄기라고 볼 수 있다.

청교도 신앙의 회중교회와 침례교
영국에서 성공회가 국교회로 자리를 잡고 국왕이 교회의 머리 역할을 하고 있던 시기에, 1581년 캠브리지 출신의 지도자 브라운(Robert Boown)에 의하여 국교와의 분리를 주장하며 새롭게 형성된 무리들이 청교도들이다. 그래서 이들을 분리주의자들(the separates)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여러 가지 속박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칼빈의 장로 제도를 배격하고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로 그리스도만을 인정하여, 그리스도의 언약 아래서 성경의 양심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무리들이 또 다른 교회 조직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회중교회의 모체가 된 것이다. 영국에서 회중교회 신도들에게 가해진 핍박 때문에, 이들은 좀 더 나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홀랜드로 이주했다가 나중에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영국에서 홀랜드로 이주한 회중파 청교도들은, 국교회 목사였다가 회중파로 개혁한 스미스(John Smith)의 지도하에 1608년 암스텔담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재세례파인 메노나이트 신자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경건한 생활에 많은 감명을 받았고, 또 그들의 교리 중의 일부인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가르침을 인정하여 성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의식을 따르게 되었다. 이들은 후에 칼빈의 예정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누구나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 그것을 자신들의 신조로 삼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그 당시 일반적으로 베풀고 있는 물을 뿌리는 세례가 역사적으로 변질된 것이며 성서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물에 잠기는 침례의식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침례교회가 된 것이다.

제칠일침례교의 탄생
16세기 후반에 출현한 청교도들은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여 발전시키고 개혁하는 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회중교회와 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고 지속적인 성경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특히 십계명의 요구사항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유지하는 매우 중대한 요소임을 인식하여 그것을 순종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라는 사실도 확신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십계명의 중심에 자리 잡은 안식일도 거룩하게 준수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라는 신념도 갖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오늘날의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던 중, 주일을 계명상의 제칠일안식일로 믿고 성수하면서 받은 빛에 충실하던 성도들에게 또 다른 빛이 이르러 왔다. 영국의 회중파 청교도 목사로 활약하던 트래스크(John Traske) 목사는, 그가 지도하던 밀 야드(Mill Yard) 교회 교인 중 한 사람인 잭슨(Hamlet Jackson)씨로부터 제칠일안식일(토요일)에 대한 소개를 받게 되었다. 트래스크 목사는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여 마침내 이를 올바른 성경적 진리로 인정하여 받아들였고, 마침내 밀 야드 교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경상 올바른 침례를 베풀며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최초의 제칠일침례교회가 되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기존의 개혁세력보다 더 구체적이고 진취적인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이름 없는 개혁자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한 역사가 있다. 처음에 가톨릭의 교리와 관습을 개혁하려고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같은 맥락에서 성경중심의 개혁을 이루어가는 신(新) 개혁 세력을 박해한 것은 아이러니다. 신성한 영역에도 여전히 인간의 죄악적 속성이 작용하고 있는, 인간 세계의 비루함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복잡하고 힘들고 어려운 과정들을 거치면서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파묻혔던 진리의 보배들이 하나씩 하나씩 밝혀져 마침내 원만한 광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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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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