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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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자들은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추구하는 궁극적 지향점이 다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 구원의 진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코란에서 성경과 같은 가르침을 찾고, 불교의 경전에서 기독교 교리와 유사한 구절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그 ‘진리의 산’을 오르는  길이 다를 뿐, 그 정상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아주 그럴듯 해 보이지만 사실은 이런게 종교혼합주의의 대표적 발상이다. 예를 들면 성경에는 나무를 사람에 비유한 경우가 더러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 나무’에 비유해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니”(요 15;1,5)라고 했다. 또 이사야는 구속받은 자들을 ‘의의 나무’(사 61:3)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을 ‘땅의 중앙에 선 한 나무’(단 4장)로, 요한계시록은 끝날 사명자를 ‘감람 나무’(계 11:4)로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보리수(菩提樹) 아래서 깨달음(正覺)을 얻었다는 것을 인용하며, ‘보리’(菩提)는 곧 진리 곧 ‘깨달음’을 뜻하므로, 보리수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진리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경지에 이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보리수는 산스크리트어로 보디 드루마((bodhi druma)이다. 이는 ‘진리의 나무’ 또는 ‘깨달은 나무’리는 뜻이다. 그런데 나무 자체가 어떻게 진리가 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것은 나무가 깨달았다는 뜻은 아니고, 석가모니가 보리수로 비유되는 한 부타(깨달은 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진리를 깨달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유를 끌어다가 이것이 곧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다고 주장하는 해석이 문제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도 창세기 2장의 에덴에 있던 나무를 여러 가지 사상(思想)으로 보는 영해(靈解)가 있다. 생명 나무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악 나무는 ‘사단의 미혹’을, 그리고 각종 나무는 ‘각종 철학’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런데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부모에게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 안에 있던 독생자라는 사실이다. 예수는 ‘말씀’이신 진리 자체로 성육신한 것이고, 싯달타는 인간의 삶의 진리를 고행을 통해 깨달은 부타가 된 것이라는 차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8)라고 했다. 예수보다 먼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온 자 중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실상이 곧 아버지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양들을 바르게 인도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품안에 있던 예수만이 하나님이 아버지되심을  알았던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4,18).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독생자 신관을 모르면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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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자들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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