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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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태복음 18:1-5)
‘어린 아이’는 순수하며 정직합니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기를 낮”춥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비유로 해서 천국에 들어갈 자의 자격을 말씀하십니다. 니체도 『짜라투스트라』에서 ‘어린 아이’를 말하였습니다. 그는 정신이 성숙하여 가는 변화의 과정을 세 가지로 말하였습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를 말하리라. 즉 정신이 낙타로, 그리고 이 낙타가 사자로, 그리고 이 사자가 마침내 어린이가 되는 사정을’(『짜라투스트라』, 제1부, [세 가지 변화에 관하여])”.
먼저 ‘낙타’의 상태를 생각하여 봅시다. 낙타란 본래 위대함이란 존재 방식에서의 현존재를 의미합니다. 신의 우위와 도덕 법칙의 숭고함 앞에서, 그 몸을 굽히고 엎드려서 큰 중량을 자진하여 부담하는 크나큰 외경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낙타는  용이치 않은 상태에 있고자 하며, 비속한 일상 생활의 안이함을 경멸합니다. 그는 자기가 확증될 만한 과제를 가지고자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용이한 일이 아니고 심한 압박이 될 만한 어렵고 엄격한 명령을 완수하려고 합니다. 그는 자기의 의무를 의욕하고, 다시 그것을 넘어서 보다 그 이상의 것에 의욕을 가집니다. 그는 신의 뜻에 따라 자기의 숙명으로서 정해진 생의 의미에 복종하려고 합니다. 순종과 복종이란 점에서 이 외경으로 채워진 정신은 그 독특한 위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확고한 가치체계에 둘러싸여서 그는 헌신적으로 자진하여 ‘너는 해야 한다’는 명령에 따릅니다.
다음으로 ‘사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달리는 낙타는 거기서 바로 그의 사자에로의 변화를 체험합니다. 무거운 짐을 견디어 내는 외경으로 가득찼던 정신은 ‘사자’로 변신합니다. 그는 자기를 ‘밖’으로부터 압박하고 제압하고 있던 중량을 벗어던집니다. 그는 그의 ‘최후의 신’인 객관적 도덕과 싸웁니다. 그는 그의 지금까지의 자기 소외를 인식하고, 객관적으로 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들과 싸웁니다. 이상주의적인 도덕에 대하여 그 초월적인 기초 놓음, 그 ‘예지계’, 그 신의 의지까지 포함해서 사자의 자격으로 싸움으로써 자유를 획득합니다. 그는 자기 속에 잠자고 있는 자유를 해방하고, 자유가 근본적으로 상실되어 있는 입장을, 즉 미리 주어진 것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할 생의 의미에 의하여 생을 규제하는 입장을 초극합니다.
세번째는 ‘어린 아이’입니다. 낙타를 지배하고 있는 ‘너는 해야 한다’에 대하여 사자는 주인답게 자기의 ‘나는 하고자 한다’를 맞세우지만, ‘나는 하고자 한다’ 속에는 너무 과도한 긴장과 방어의 자세가 있고, 과도한 반항과 자기 경직이 있습니다. 이 새로운 의지는 아직 고의적이며, 그것은 아직 창조적인 의욕으로서의, 또 새로운 가치들의 새로운 투기로서의 참된 자유자재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비로소 그것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無垢합니다. 하나의 새로운 시작, 유희, 스스로 회전해 오는 차륜, 제 일 운동, 성스러운 긍정입니다. 정신은 이제야 스스로의 의지를 의지한다. 세계를 잃었던 정신이 스스로의 세계를 획득합니다.
세 사람의 인물상이 위의 3단계에 대응합니다. 자기를 인간을 능가하는 어떤 위력의 통로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최대의 봉사적 인간인 천재는 낙타에 대응합니다. 비판자이고 부정자이며 미지의 먼 해안을 향한 대담한 항해자인 자유 정신은 사자에 대응합니다. 그리고 긍정자이고 새로운 가치들의 정립자인 짜라투스트라 자신은 유희하는 어린 아이에 해당합니다.
‘어린 아이’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을 보고 상심해 있던 두 제자를 생각해 봅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던 마을의 이름입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살아왔는데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나, 향후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전해야 하나, 영적 세계를 어떻게 전해야 하나 등으로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누가복음 24:27)셨습니다. 주님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이루신 후 부활하셔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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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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