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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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은 시간이고 역사이며 기억이고 연대이다. 땅의 진화의 오랜 시간이 축적되어 ‘나’라는 생명이 있는 것이고 내가 존재함으로 조상과 후손이 연결된다. 여기에 생명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 바로 생명의 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는 이 창조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는 신앙한다. 사도신경 역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렇게 사도신경 신경을 고백한다. 이 창조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적인 고백이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오늘의 삶을 살기 위하여 변화를 요청하는 시대에 허황되게 살고 있다. 그러므로 참으로 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가야 한다. 그렇다면 생명의 윤리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생명의 의미를 알고 생명과 관계되는 요인들을 드러내고 역사, 공동체, 환경 등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예컨대 생명은 변화하는 조건의 유동성 속에서 그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의 자발적 활동과 경험을 알아야 한다.
생명은 정체성의 힘(the power of identity)이며 인간의 구체적인 실존을 가리킨다. 그리고 생명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게 물질적 존재를 초월하여 신령적(numinous)이다. 즉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이지 인간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러한 전제를 수용하면 여기에 나 생명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운명 지어진 것을 믿음으로 알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의 책임을 묻게 된다.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즐기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것을 아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육신의 생명은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한편 성서의 말씀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모든 생명을 다스려라” 명령했기에 흔히 인간이 만물의 지배자라고 오해하여 자연을 훼손해도 좋은 냥 인간 중심으로 착각하여 이 시대의 문명권을 지배하고 왔음을 부인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다스림’의 위치만을 착각했다는 점을 깨닫고 오만 방자한 태도를 버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란 사랑과 정의, 돌봄과 섬김에 근거한 다스림이지 결코 지배와 억압에 의한 다스림이나 오만 불손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기를 학수고대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음을 본다.
로마서에서 바울의 회심을 통해 아는 것은 로마통치하의 세계는 피조물조차 ‘사멸의 종살이’에 시달리는 모습을 알게 한다. 당시 세계는 로마의 폭력이 두려워 잠잠한 상태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생명은 전적으로 ‘허무를 만드는 힘’으로서 로마의 무력을 인정하는 대가로 보장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평화, 즉 ‘죽음과 같은 고요’를 이룩한 로마 황제에게 지고의 존재로 숭배되었다. 이러한 세계에 당시 바울의 회심은 ‘부정의 부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 당시 바울의 ‘다시 삶’은 ‘죽음의 죽음’이었다. 이같은 바울의 회심은 ‘부정의 부정’으로 이해한다. 이는 바울의 중생, 또한 이 ‘다시 삶’은 죽음의 죽음이었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체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살리는 생명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이 생명운동은 자연의 착취와 파괴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를 ‘죽어가는 생명’으로 보며 바로 그러한 위기의 원인으로서 인간, 인간중심주의로 더 나아가 근 세대적인 욕망의 위기를 보는 것이다. 예컨대 당시 로마의 도처에 일어난 만연한 죽음의 문화에 대응하기 위해 죽음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죽임의 체제 곧 팍스로마나(Pax Romana)의 본질에 접근 하며 바울은 생명운동에 자연의 착취와 파괴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를 ‘죽어가는 생명’으로 보는 삶의 태도에 ‘생명을 살리는 삶을 보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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