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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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사라진>(1830)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어느 날 밤, 란티 가문의 대저택 안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밖으로 솟아나온 창문턱에 걸터앉아 비단커튼 주름 뒤로 몸을 감추고 서술자는 시끄러운 파티의 한가운데서 몽상에 빠집니다. 밖에는 죽음의 춤이 어른대는 어둡고 앙상한 정원이 보이고, 안에는 파리 최고의 가문과 재산을 자랑하는 상류사회 사람들의 호화스런 파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오른쪽엔 춥고 음울한 영상과 왼쪽에는 호사한 삶의 영상이 공존하는 가운데 서술자는 한쪽 발은 추위에 떨리고 다른 쪽은 열기에 차 있음을 느낍니다.
무도회의 넘치는 풍요와 미, 그리고 마담 란티의 두 자녀의 교양과 미모에 대한 찬사 속에서 사람들은 란티 가문의 근거와 재산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이때 딸 마리아니나가 지독히 늙고 추한 모습의 노인을 앞세우고 나타납니다. 차가운 불협화음을 몰고온 노인은 좌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나의 파트너인 마담 로체피트를 두려움으로 떨게 합니다. 노인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아도니스의 초상화는 아름다웠습니다. 그 초상화에 경탄을 금치 못하는 서술자의 파트너에게 서술자는 알려 줍니다. 서술자는 그 초상화가 원본이 아닌 어느 여자의 조각을 본뜬 것으로 그 여자는 마담 란티의 친척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니나는 노인을 뒷문으로 내보냅니다. 젊음과 미모로 나를 애태운 마담 로체피트는 노인에 대한 비밀을 당장 알고 싶어하지만, 서술자는 다음 날 그녀의 방에서 단둘이 된 후에야 이야기를 꺼냅니다.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난 사라진은 공부를 많이 하여 훌륭한 법관이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에 걸맞지 않는 괴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어릴 적부터 반항적이고 몽상적이었던 그는 언제나 복잡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는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성향이 야성적으로 폭발되는 충동적인 성격이었다. 공부 시간에는 선생의 모습을 벽에 그려 놓기 일쑤였고 예배 시간에는 괴상한 조각을 새기곤 했다. 드디어는 방자한 그리스 도상을 새긴 죄로 학교에서 추방된다. 그의 예술적 재능과 폭발적 열정은 마침내 파리에서 유면한 스승을 통해 갈고 닦여 22세에 대상을 받고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된다.
조각만이 삶의 모든 것이었기에 세상사나 사교에는 어두웠던 사라진이 로마의 어느 극장에서 쟘비넬라의 노래를 듣게 되는 것은 그의 운명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한다. 그녀의 미모는 조각가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이상이었고 그녀의 노래는 예술가의 열정에 기름을 붓는 신비 그 자체였다. ‘그녀의 사랑을 얻든지, 아니면 죽으리라!’ 고통과 기쁨이 교차되는 열정으로 그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수없이 그려내며 조각으로 새긴다.
매일 극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쟘비넬라의 모습과 노래에 도취되던 사라진의 열정은 드디어 인정을 받은 듯, 그는 그녀의 파티에 초대된다. 그날 밤 사라진의 구애를 거절하는 쟘비넬라의 말과 행동은 역설적으로 더욱 그를 자극한다. 그녀를 납치할 계획을 세운 사라진에게는 로마 왕자가 귀띔하는 진실조차 귀에서 멀었다. 그녀는 여자 역할을 하도록 길러진 거세된 남자 배우라는 것이다. 납치한 쟘비넬라의 입에서 사라진은 처음의 만남이 그의 순진성을 놀려 주려 한 주위 사람들의 계획에 그녀가 동의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듣는다. 절망 속에서 그는 그녀의 동상을 쳤으나 실패했고 다시 그녀를 죽이려 할 때 후견인이 보낸 잠복자들에 의해 살해된다.
사라진이 죽자 쟘비넬라의 후견인은 그녀의 동상을 가져다 대리석에 새겼다. 란티 가문은 화가 비엔으로 하여금 그것을 다시 본떠서 아도니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쟘비넬라는 바로 그 늙고 추한 노인으로 마담 란티의 아저씨이다. 그래서 란티 가문은 그들의 과거를 숨기는 것이다.
여기까지 들은 마담 로체피트는 충격 속에서 돌연 세상을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시선으로 봅니다. 오늘날엔 더 이상 그런 불행한 연애는 없다는 의도로 들려 주었노라는 서술자의 달램도 그녀를 혐오감에서 건지지 못합니다.
이 소설에서 인지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아도니스의 초상화’의 진실을 모른 채 그 표면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자크는 발단 부분에서 빛과 어두움, 창의 안과 밖 등 양 면을 다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쟘비넬라가 거세된 남자 배우였음이 밝혀지는 것은 한 인간의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는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양면성을 알지 못한 채 어느 한 쪽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자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느 한 쪽만을 편향되게 바라보지 말라는 얘기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의 편견을 불식시키는 일도 하셨습니다. 그것은 행복이 권력자나 부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에게도 있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은 죄의 굴레에 갇혀 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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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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