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

27. 북서유럽 주요 국가들의 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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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 유럽의 국가들은 거의 가톨릭 세력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 막강한 교권에 저항하여 기존의 신앙의 틀을 깨고 성경 중심의 새로운 신앙을 확립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것은 피를 흘리며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극한투쟁이었다. 종교 개혁의 과정에서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종교개혁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유럽의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성경의 진리가 밝혀진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이는 ‘진리’가 ‘목숨’보다 소중한 것임이 확인되는 역사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는 예수의 말씀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증명된 불변의 진리이다.

네덜란드의 종교개혁
네덜란드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교황권에 대하여 매우 격렬하게 항의하며 로마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을 과감하게 공격하던 국가이다. 이러한 개혁의 성향을 가지고 진리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교사들의 활동은 시대를 통하여 계속 이어져 왔으며 그들은 왈덴스인들이 번역해 놓은 성경을 네덜란드어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등 개혁사업을 매우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로마교회의 박해를 통해서 화형과 고문이 계속되었지만, 그러한 중에서도 신자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개혁자 중의 한 사람이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였다. 그는 원래 매우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나 개혁신앙을 받아들여 성경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그는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25년간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개혁신앙을 전파하였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의 교리를 가장 광범위하게 받아들인 나라이기도 하고 가장 무서운 박해를 받은 나라이기도 하다. 핍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개신교 신앙을 가진 남자들은 검으로 죽이고 여자들은 산 채로 매장하여 죽였다. 어린 아이들까지 죽였다. 그러나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개혁신앙을 고수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흘린 피는 언제나 씨가 되어 더 널리 퍼져나갔다. 마침내 윌리엄 3세(빌렘 3세)의 지도하에 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네덜란드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

덴마크의 타우젠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는 피흘림이 없이는 개혁사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북유럽의 나라들에게는 비교적 복음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종교개혁의 산실이었던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개혁주의 사상을 전파했던 것이다. 순박하고 용감한 북유럽 사람들은 로마교회의 미신적인 신앙과 사치와 부패를 용납하지 않고 순수한 신앙을 가르쳐주는 성경의 진리를 쉽게 받아들였다.
덴마크의 개혁자로 널리 알려진 타우젠(Tausen)은 로마교회 승원장의 도움으로 가톨릭의 요새라고 할 수 있는 쾰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신비설에 빠져있는 학생들의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아, 로마교회에서 입학을 금하고 있는 루터의 비텐베르그 대학으로 옮겨가서 수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은밀하게 개신교의 복음을 전하다가 승원의 독방에 감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창틈으로 동료들에게 진리를 전하였고, 승원 안에서도 개신교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마침내, 개신교 신앙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보호하라는 국왕의 명령이 떨어졌고, 타우센은 자유롭게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덴마크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이 널리 보급되면서 개신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증대되었다. 결국 덴마크는 국가적으로 개혁주의를 받아들였다.

개혁운동의 보루가 된 스웨덴
스웨덴에서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유학을 갔던 학생들 가운데 루터와 멜란히톤의 가르침을 받은 탁월한 두 청년이 있었다. 올라프 페트리(Olaf Petri)와 라우렌티우스 페트리(Laurentius Petri) 형제였다.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와서 개혁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로마교회의 반대가 격렬했다. 신부들은 대체로 개혁신앙을 반대할 때에 무지하고 미신적인 신도들을 충동하여 일하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자주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되고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이 두 형제들도 폭도들에게 피습되어 목숨만 겨우 건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왕이 이 개혁자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로마교회가 지배하는 동안 국가는 피폐해지고 국민들은 빈곤의 늪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상징과 의식으로 이루어진 예배에 길들여졌고 깊은 절망 속에 빠져서 무의미하게 사는 것이 그 당시 상황이었다. 왕은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여 개혁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개혁신앙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혁신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유력한 지식인들이었고 일반적인 학문과 함께 성경에 대해서도 깊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얼마 후에는 국회에서도 개혁신앙을 지지하기로 하였다. 그 두 형제는 왕의 지도를 받아서 성경을 스웨덴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제 스웨덴은 성경을 자유롭게 볼 수 있고 개혁신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나라가 되었다. 1세기 후에, 스웨덴은 가톨릭 국가들과 개신교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에 참여하여 거의 망해가는 독일을 구해내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여러 나라에서 개혁주의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영국의 웨슬리 형제와 감리교회
영국 출신 윌리암 틴들(William Tyndale)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전을 기초로 성경을 번역하여 종교개혁에 기여한 위대한 인물이다. 그 당시 성경을 보거나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틴들은 비밀리에 독일로 도피하여 성경을 번역하였고, 마침내 그는 성경을 번역한 죄로 1535년 네델란드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 성경은 스코틀랜드와 영국에 종교개혁의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특별히 스코틀랜드에서는 열렬하고 위대한 개혁자 존 녹스(John Knox)가 출현하여 ‘오직 성경’의 정신으로 로마교회를 지지하는 여왕을 대항하여 과감하고 용감한 개혁 사업을 이루어갔다.
영국에서는 개신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로마교회의 박해는 미약해졌지만, 이제는 국왕이 교회의 머리 노릇을 하였다. 국교주의 정신으로 국가가 정해주는 방식에 따라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강요하였고, 이를 위반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추방하였다. 이러한 핍박이 도리어 복음을 북미에 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 당시 핍박으로 감옥에 갇혀있던 존 번연(John Bunyan)이 옥중에서 저술한 ‘천로역정’은 불후의 명저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 신앙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였다. 이러한 국교회(國敎會)에 의한 박해의 역사가 거의 100년을 지배하던 중에 나타난 영국의 위대한 개혁자가 바로 존 웨슬리(John Wesley)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형제이다. 이 두 형제는 남달리 성결한 마음과 경건한 행위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나, 별로 성과가 없었고 이로 인하여 늘 마음의 부담과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상태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선교 여행을 가던 중에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는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기들과는 달리 아무런 동요 없이 평안한 모습으로 항해하고 있는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신앙과 삶을 연구하게 되었고, 마침내 인간의 노력으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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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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