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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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 전 3권이 완간되었다. 3권 제1부 “도시국가 그리스의 종언” 들머리에 실린“소크라테스 재판”의 대강을 소개해 본다.
기원전 399년의 봄, 아테네. 70나는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 섰다. 고발자는 미레토스. 역사는 그가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는 사실로만 그를 기억한다. 이름을 날려보려 발버둥치는 조무래기를 조종하는 것은 아나토스와 또한 사람의 민주정부의 거물.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은 소수 지도자가 통치하는 과도정(오리가르기아)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민주정(데모크라티아)이었다.
소크라테스의 혐의는 두 가지. 그리스 전래의 신들에 대한 신앙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과 아테네 젊은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쳐서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것.
독신 죄에 대해서는 잠간 미뤄두기로 하고, 아테네의 젊은이에게 철학을 가르쳐 나쁜 영향을 주었다는 죄목에 대해서 살펴보자.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떠올렸을 두 인물은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 둘 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알려져 있었고, 도시국가 아테네에 해를 끼치고 있다고 인정되고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법정의 출두명령을 무시하고 스파르타로 도망가서 조국에 해를 끼칠 정보를 스파르타에게 넘겨주었고, 크리티아스는 30인정권이란 이름의 과두정부를 수립해서 아테네에 공포정치를 가져왔다는 것.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5년 전에 암살되었고, 크리티아스도 4년 전에 전사했다.  
그런데 왜 지금? 요직을 맡을 수 있는 나이가 30 세로 정해진 아테네에서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에 망명한 것은 35세가 되는 해였고, 크리티아스가 공포정치를 편 것은 그의 나이 56세 때. 성인이 된지가 이미 오래인 제자의 책임까지 청소년시절의 스승이었던 이가 감당해야 된다는 말인가?
소크라테스는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 결과가 민주파가 되 든 과두파가 되든 그것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다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했었고, 선출되어 국가공무원을 지냈다. 그것은 아테네가 민주정을 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조국이기에 책무를 다한다는 자연스러운 애국심에서였다. 그러니까 제자 중에 민주파가 있건 과두파 추종자가 있건 그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추천으로 뽑은 5백의 시민이 재판정에 모였다. 고발자 미레토스는 피고 소크라테스의 죄상을 들어 비난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투표결과는 유죄 250, 무죄 220. 차이는 30표. 유죄와 무죄의 차가 크지 않으면 벌금형이나 타국에 망명하게 하는 정도의 형벌로 재판이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타협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정공법으로 “변명”을 전개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들은 후에 실시한 투표 결과는 유죄 360, 무죄 140으로 돌변한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인들을 노엽게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죄목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두 차례나 징집되어 전장에 갔었고, 피선되어 공무원으로 봉사해서 아테네 시민의 책임을 다했던 소크라테스이고 보면, 자신을 재판하는 아테네의 법 또한 아테네의 법인 이상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변명의 요지가 재판관들을 노하게 했다.  
왜? 저자 시오노는 당시 아테네인들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정황 속에서 초초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보았다. 나의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 하고 말한 소크라테스가 미워진 것. 초조해하는 자신들과는 달리 침착해하는 소크라테스에게 분노를 퍼부은 것이었다.
그들의 조국 아테네가 민주정은 부활했으나 일관된 정략도 찾지 못한 채 초조불안해하고 있는 자신들의 책임을 타자에게 전가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것.  희생양 소크라테스는 죽음으로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지만, 아테네는 그들 곁에 남아 있는 애국자를 사형함으로써 영영 미로에서 탈출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말았다는 저자의 생각에, 그것을 소크라테스의 성공이라 보아야할지는 각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꼬리표를 단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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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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