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참전유공자 사무실 출근, 서울에 원로장로회 등 각종 모임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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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환 장로(86세, 예장합동 포천 송우교회 원로)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회에 참석하고, 자신의 농장과 골프장 주변의 청소와 풀과 나무 등 조경을 가꾸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임 장로는 건강을 위해서 별다른 운동을 하지는 않지만 “워낙 활동을 많이 하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건강을 덤으로 주시는 것 같다”면서, 서울에 나갈 일이 없으면 포천의 참전유공자 사무실에 출근 한다고 한다. 6.25 참전유공자로서 포천지역 회장을 역임했다. 포천을 벗어나서는 주로 서울로 외출을 하는데 전국원로장로회연합회, 한국기독교원로장로회연합회 그리고 잃은양찾기운동본부 등의 모임에 매주 3회 정도 참석하여 교제하며 좋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임 장로는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1950년 6.25 전쟁 당시 피난하여 바로 육군에 입대하고 전쟁에 참전하였다. 고향 북한 땅에는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을 남겨두고 아버지와 피난 나오는 중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형과 함께 남쪽으로 넘어 왔다. 이들 형제는 함께 군에 입대하여 전쟁 중에 형은 전사했고, 임 장로는 혈혈단신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저는 제대 후에 연고지가 없어 군 생활을 하던 가까운 포천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를 반겨 주는 사람이 없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구걸을 하는 거지생활로 사회생활을 시작 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기에 23세의 나이로 밥이라도 먹고 지낼 수 있는 길을 찾다가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갔으나 고된 일을 감당할 수 없어 그만 두었어요.”
어느 날 자신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노인 엿장수를 만나 그의 권유로 엿장수 생활을 3년여동안 하였다고 한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살라’는 말을 듣고 그래도 엿장수는 자유로워 맘대로 일하고 자유롭게 교회에 갈 수 있었기에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연유로 고물상을 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일하던 중 고물상 주인은 신실한 그를 보고 그곳 ‘만세교’ 다리 근처에 고물상을 차려주었다. 고물상은 점점 더 번창해 갔다.
임 장로는 그 후 4.19 혁명 때에 고물상을 그만두고 인근 군부대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고 제법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포천에서 의정부 사이에 한 교회가 종각을 세우고 있는 것을 보고 그분에게 “일을 좀 할 수 있는 자리가 없느냐”고 하니까 마침 그분은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었다. 그 인연으로 지금의 포천의 송우교회 쪽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잘 풀려 나갔습니다.”라는 임 장로는 그동안의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다시 축산업을 시작하게 되어, 양계, 돼지, 젖소 등을 기르는 ‘청림목장’을 운영하면서 파격적인 수익을 얻게 되었다.
임 장로는 앞서 교회당 건축에도 빚을 얻어 헌금하여 대지구입과 건축에 힘을 합하였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까 감당할 수 없도록 목장이 늘어났고, 사업이 번창하여 넉넉한 생활을 넘어 포천 지역의 당당한 유지로 나서게 되었지요. 정말 잘 풀렸지요.”
임 장로는 그로부터 교회 일은 물론이며, 포천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 인물이 되어 지역 활동을 하게 되었고, 교단과 연합사역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가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이렇게 큰 복을 받아 누리게 된 것은 3대에 걸친 신앙가정에서 태어나 어떠한 어려움과 난관에서도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결과일 것이다.
임 장로는 윤선애 권사(80세)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어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2남은 목회자로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으며, 자녀들 모두가 신앙으로 바로 자라서 사회생활을 잘 하고 있다. 임 장로는 가장 보람 있고 감사한 것은 자녀들이 모두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자란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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