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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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이전에 필자가 한신에 들어가기 전 적어도 40년은 되었을 어느 해에 수유리 소재 송암교회에서 민주화 보고 집회 후 뒤풀이 마당에서 문익환 목사님께서 덩실덩실 춤추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기장은 60년대부터 7~90년대까지 민주화와 통일의 기도를 행동으로 실천해 오는 교단이다. 7~80년대에 박정희의 저곡가 저임금 수출주도형 중심의 정책으로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임금과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그들의 희망을 짓밟았던 그 시절에 그래도 예루살렘의 성전중심의 권위 있는 제사장보다는 흑암의 갈릴리 이방 사람들, 생산자이면서도 생산물로부터도 소외당하고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던 그 시절에, 기장은 자본주의 성장과 편승하여 재벌과 불의한 권력에 기생하지 아니하고 병들고 가난하며 힘없이 사는 변두리 사람들, 자본과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약자와 삶의 현장의 변두리로 내 몰리며, 주류사회 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받고 사는 민중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친구가 됐다. 절망을 희망으로 살도록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고, 정의의 바탕 위에 사랑과 용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 자유와 평등. 외세를 배격한 진정한 자주와 민족. 민중 주체의 통일을 부르짖고 몸으로 실천하였다.
현재의 기장은 교인수가 많이 줄어들고 리더쉽도 예전 같지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의 부재를 다시금 살리려면 다시금 겸손하게 과거의 향수에 젖어 지나간 추억만 되새김질 하는 게으름과 나태에서 벗어나서 예수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상품화 하는 자본주의 찌꺼기를 붙잡는 껍질들과 자만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근자에 며칠 동안은 한반도와 주변정세가 춤을 추고 있다.
4.27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미 멕스센더 연합훈련 등으로 북한은 한미의 진위를 의심케 되었고, 여기에 대한 강경한 담화 등으로 예측할 수 없는 협상과 국제 장사꾼인 도널드 트럼프의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취소와 이후의 전격적인 통일각의 남북 제 2정상회담 등 정말 숨 막히는 연출들로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통일의 길은 살얼음판 같고 동시에 통일에 대한 73년의 민족적 염원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알고도 남는다. 한반도의 분단을 초래한 남북의 분단고착의 시작은 미소의 전후처리에 있고 특히 루스벨트의 40년 한반도의 정치적 보호주장과 신탁에 있다.
미국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과 1905년 태프트- 카쯔라의 밀약으로 일본에게 한반도의 실질적 지배를 승인하였다. 조선반도와는 한 번의 의견 교환도 없이 그리고 마침내 2차 대전 후의 전승국의  갑질을 하며 북은 소련이 남은 미 점령군이 오늘까지 신 식민지 군 통치세력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미국은 자국의 이익과 동북아 패권을 유지, 지탱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던가. 그리고 40년 동안의 식민지 군국주의의 역사와 그 부활을 학수고대 하는 일본이고 다음으로 한국세계전쟁에 참여해서 국가의 안정과 경제적 근거를 확고히 하고 다시 미국과 패권 싸움을 시작한 중국 왕 서방의 음흉한 계산, 그리고 과거 한반도의 북쪽 점령군의 맛을 톡톡히 본 북극곰의 러시아일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지정학적 입장을 잘 알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등 과거 식민지 확장 정책으로 세계를 지배 하였던 강국들의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다시 국제 장사의 두목 중 하나인 부동산 업자 트럼프가 전격적 취소를 하였던 6.12 싱가폴 북미정상 회담 개최를 위한 북미 실무회담을 성김과 최선희가 판문점에서, 그리고 북한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폼페이와의 만남을 위하여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한반도의 통일은 춤추고 있다. 그래도 좋다.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서 통일의 날 이루어지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시편 23편은 주님이 목자 되시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그러나 분단을 살면서 심연의 고통을 알고 있는 한민족은 통일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통일문지기, 아니면 통일의 청소 꾼이 되어도 좋다. 통일은 누군가와 만나는 것이다,
통일은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다. 통일은 누군가와 사랑을 하는 것이다. 통일은 누군가와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것이다. 통일은 누군가와 새 역사를 가슴에 쓰는 것이다. 통일은 누군가와 희망을 설계하고, 통일은 누군가와 역사의 새 지평을 여는 것이다. 통일은 누군가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는 것이며, 통일은 함께 손에 손을 맞잡고 쓰러질 때까지 덩실덩실 춤사위를 돌리며 춤추는 것이다. 통일은 흰돌 강희남 목사가 말씀 하셨듯이 자본과 권력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서 주류사회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사는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그 중심에 서는 것이며, 다시는 눈물과 억울함과 슬픔, 그리고 절망과 좌절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 민중들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너무 기뻐서 주체할 수 없도록 춤을 추는 춤추는 통일을 위해서 우리 모두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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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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