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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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교회는 지난 17일 대한민국 첫 공식주일예배 133주년 기념주일 논문발표회를 가졌다. 이 글은 이날 허성식 교수가 발표한 “십자가의 길 - 한국교회가 선교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 가야할 길”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는 해방후 정부 수립 때부터 권력지향적
교회성장과 성공지상주의 대표적 사례가 대형교회
한국교회 기복주의는 맘모니즘 성직매매의 악행

1. 권력지향주의
한국교회는 일찍부터 정교분리 원칙을 세웠다. 그것은 19세기말 시작된 한국교회가 처한 역사적인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 식민지배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한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선교사들은 이제 막 시작된 한국교회가 이같은 정치적인 격변기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소멸될 수도 있다는 염려를 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1901년 9월 장로회공의회에서 발표한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조건”을 통해서 교회의 비정치화를 천명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한국의 엘리트 민족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독립협회운동 등으로 인해 탄압을 받아 해산되는 것을 본 후에 신생교회였던 한국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였다. 이런 교회의 정교분리 원칙은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왜냐하면, 교회가 3.1운동을 비롯해서 민족주의운동에 연루한 결과 일제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아 교회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정교분리 원칙을 무너뜨린 것은 일체의 신사참배 강요였다. 종교적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교회는 생존하기 위해서 결국 산사참배에 참여하고 친일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신사참배와 친일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졌던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이런 잘못된 과거를 회개하고 청산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왜냐하면 해방 후, 남과 북의 좌우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해 한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50년대 한국교회는 반공주의를 내세운 이승만 정부와 밀월 관계를 맺으면서 다시 한번 정교분리 원칙을 무너뜨렸다. 1948년 선출된 제헌 국회의원 208명 가운데 44명이 기독교인이었고, 5월 31일 국회 개원식을 기도로 시작했고, 8월 15일 정부 수립시 대통령 취임선서도 기도로 하였을 정도로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적 자유 민주국가를 지향했다. 그 결과 기독교인이 정부 고위직의 39%, 부처 장관의 47%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런 것은 1945년 기독교인 비율이 0.5%이고, 1962년에도 2.4%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비율이었다.
오늘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보수 기독교의 핵심세력들은 정교분리를 표방하였던 그 시절에도 사실은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구체적으로 정권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정권에 대한 비판적, 저항적 태도는 정치행위로 간주하면서, 잘잘못은 분별하지 않은 채 정권을 정당화해 주는 조찬기도회와 같은 형태를 종교행위로 간주하는 것은 분명 모순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으면서, 정교분리의 원칙에 입각해서 교회의 예언자적 위치를 회복할 수 있는 최적기라는 말을 하고 싶다. 한반도에서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이 체결될 날이 눈 앞에 다가오는 이 때, 통일을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이 때, 한국교회는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지난 보수적인 정권들에서 친일적인 역사관과 종북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보수 정권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는 역할을 충실히 했다. 정권이 교회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순간, 교회는 그들의 정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일을 했다.

2. 교회성장과 성공지상주의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역사 가운데, 특히 비서구권 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주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한국교회는 교파별로 세계에서 가장 큰 초대형교회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신학교들의 규모나 신학자들의 숫자도 대단하다. 해외선교 면에서도 전체 기독교인의 수에 비해 굉장히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부흥의 역사는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해서 시작한 한국교회의 성장은 일제 식민시절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주춤했었다. 반 세기가 넘는 이 기간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고난과 역경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이 기간에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일제에 저항했던 사람들과 공산주의자에게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전후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의 타락과 이어진 4.19혁명, 5.16쿠데타, 그리고 군사독재시절을 지나면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분단과 이산 가족의 아픔을 안고 한국교회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50년대와 60년대 한국교회는 기도원 운동과 부흥회를 통해 크게 위로 받고 성장했다. 이 시절은 영락교회를 비롯해서 월남 피난민들이 모이는 교회들이 크게 성장했다. 70년대 들어서 한국사회는 국가적으로 경제성장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교회도 이 때부터 성장을 위해 매진하였다. 특히 미국으로부터 교회성장론이 수입되어 이런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한국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교파를 초월해서, 그리고 보수-진보 진영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교회들이 이와같은 교회성장을 위해 노력을 경주했다.
사실 한국교회는 이때부터 지금까지도 거의 모든 교단들과 교회들이 이와같은 교회성장론에 지속저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교회성장론에 의하면 교회와 교단은 구체적으니 성장 목표를 세우고 전도와 교회의 숫적 증가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교단은 5,000교회 운동 혹은 3만 교회 운동 등과 같은 전도 전력을 수립했었고, 지금도 많은 대형교회들이 숫적인 성장을 위해 이런 성장 전략을 세우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교회성장과 성공지상주의에 빠진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해 온 김진호는 전쟁 직후에는 월남한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전투적인 반공주의를 행동화했던 영락교회와 같은 대형교회들이 급성장했고, 그 이후에는 한국사회의 경제개발과 발맞추어 순복음교회와 같은 대형교회들이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고 본다. 그는 이렇게 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성장했던 대형교회들을 선발 대형교회들로 보았다. 그는 순복음교회를 “성공지상주의”를 대표하는 교회로 보고 “건강과 재산은 축복이 영적 축복과 서로 얽혀 있다는 3박자 구원론은 도시빈민으로 편입된 이 농민들에게 현실의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삶의 적극적인 의지로 이해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3. 맘모니즘
이원규는 한국사회를 통치자들의 철학부재, 정신적 가치부재, 도덕적 이념부재로 인해서 돈이 우상이 되어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탕주의, 편법주의, 요령주의가 판치는 사회, 그리고 이런 일들에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연루되는 권력형 비리가 기생하는 사회로 보았다. 그러면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런 맘모니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이원규가 살펴본 한국교회 내의 맘모니즘은 다음과 같다.
교회에 대한, 목회자에 대한, 교인들에 대한 평가는 하나같이 물량적 척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 교회는 그 조직의 운영면에서 신도의 숫자, 건물의 크기, 헌금의 규모 등을 비롯하여, 성직자의 사례비와 승용차의 모델에 이르기까지 물량적 지표들이 종교적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다. 목회의 성공을 예산이나 교회 규모와 같은 물질로 평가하며, 물질적인 가치를 성공의 지표로 삼는 천민적 자본주의 시장논리에 물들어 있다… 교인의 맏음생활을 수량화하여 수치를 등급화한 구역 통계표는 일반 기업체의 계산서나 실적 보고소를 연상케 한다.
이원규는 한국교회에 나타난 이런 맘모니즘의 극치는 성직매매임을 지적하면서, 한국교회 교단장 선거는 온통 돈잔치로 물들어 있음을 비판한다. 성경도 교회안에서 맘모니즘의 폐해가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성직매매임을 가르쳐준다.
사도행전 8장 9-24절에 등장하는 인물인 시몬(Simon)이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여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그런 성령을 줄 수 있는 권능을 달라고 돈을 내밀자 베드로에게 심하게 책망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 사건에 유래한 단어가 성직매매, 시몬니즘이라는 용어이다. 우리는 교회 역사를 통해 이런 성직매매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성직매매의 악행이 가장 기승을 부렸던 때가 바로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교회 시대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비춰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현재의 모습이 마치 중세교회와 흡사하다는 평가와 비판 앞에서 경각심을 새롭게 해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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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버려야 하는 세가지 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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