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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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제자 가운데 김천대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이충웅 박사님이 있다. 이 박사님은 한국대학생 간사 소속으로 인도에서 6년을 사역하신 분이시다. 그가 마지막 박사학위 논문을 구상할 때에 한국에서는 “크리스챤 요가”라는 명상 프로그램이 한참 유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비판적 관점으로 연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이충웅 박사는 그 부분을 연구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게 되었다. 벌써 몇 년 전 일이지만 새삼 스럽게 요즈음 한국에서 인기 있는 명상 프로그램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글을 쓰게 되었다.
명상이라는 용어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명상이란 “집중·사색·추상 등 여러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사적인 예배나 정신훈련”이다. 즉 명상(瞑想, meditation)은 “마음을 자연스럽게 안으로 몰입시켜 내면의 자아를 확립하거나 종교 수행을 위한 정신집중을 널리 일컫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주의를 두다, 공부하다, 연습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 ‘melet’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고, ‘med-’는 ‘돌보다, 낫게 하다’를 의미한다. 이것을 종합하면 ‘meditation’은 ‘수련, 훈련, 치유’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를 한자로 풀면 좀 더 그 의미가 명확해 진다. 눈 감을 명(瞑)과 생각 상(想), 즉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함 또는 그 생각”이 바로 명상이다.
이러한 명상은 요즈음은 동양 보다는 오히려 서양에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된 하다. 즉 과거 기독교 국가로서 그 명성을 떨쳤던 많은 서구의 국가들이 동양 종교사상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매해 요가와 명상을 위한 장소들이 생겨나고, 많은 수의 명상 수행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깔끔한 사람들의 거품 목욕”으로 명상을 비유하며, 이것을 통해 자신들 안에 내재된 정신적 영적 공허감의 문제와 신체적 돌봄의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한다.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유행을 넘어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명상은 이제 보편적인 행위로 인식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듯하다. 이러한 움직임이 단지 비기독교인들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 아님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많은 교회들과 기독교인들 역시 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나 숙고함 없이 well-being을 위한 하나의 시도, 또는 문화적 차원으로만 이를 인식하여 무분별하게 실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참다운 Well being을 위한 길은 동양 종교에서 말하는 명상 프로그램 만이 가능한가? 결론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실질적인 well-being의 의미는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well-being이 단순한 차원의 신체적 건강을 의미하지 않고,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여타의 타종교들이 현세기복적인 사고 안에서 ‘오늘’에 집중하는 반면, 성경은 내일을 향한 ‘소망’에 중점을 두고, 오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삶의 목적과 방향을 둔다.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말씀이 바로 마가복음 9장 43-47절이다. 본문은 불구자나 절뚝발이 그리고 한 눈만 가진 자라고 하더라도 지옥에 가는 것보다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즉 다른 말로 말해서 세상적 가치를 두고 살다가 그 죄로 인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비록 온전한 몸이 아니라 할지라도 영생에 들어가는 것, 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삶임을 밝히고 있다.
또 다른 예로, 세상이 주는 평안은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이다(요14:27). 세상의 어느 것도 진정한 평안을 줄 수 없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도 못한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에게 참 평안을 허락하시고, 그로 인해 우리는 진정한 well-being을 맛볼 수 있다.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차원 뿐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없이 well-being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된 건강을 얻는 길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 속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기독교가 진리의 근본이 되는 성경적 삶보다는 혼합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로 채우려고 무단히 애쓰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이제  명상 이라는 자기 수련의 구도의 길을 버리고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해야 하겠다. 크리스챤 요가가 제자에 의해서 비판 되듯이 명상도 누군가에 의해서 비판 받아야 할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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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 요가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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