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5
2018/08/23 17:4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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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디 아도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시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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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모두 미래형이다. 그러나 한글 번역 바른 성경은  1절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원문대로 미래형을 쓰고 있다. 그러나 2-6절에 나오는 동사들 “눕게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함께 하십니다” “안위하십니다” “넘칩니다” “따를 것이니” “영원히 살 것입니다”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미래형이라기보다는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다. 시편 역자는 이 시를 통하여 현재 역경 가운데 있는 자기 자신의 형편을 토로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현재 돕고 계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의미상 뜻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미래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P. C. Craigie (WBC) 는 원문의 뜻을 놓치지 않고 잘 살려 모두 미래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현재 그의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주시고, 갈 길을 인도하고 보호하시는 육신의 목자보다는, 장차 자기에게 생명의 떡과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주시고,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의의 길,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영혼의 목자, 곧 메시야를 바라보고 고대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4절은 그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다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주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주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 사망의 골짜기를 다녀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개역성경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번역했다. 일반적으로 사망이 있는 곳은 어디나 어둡고 음침한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음침하다거나 어둡다거나 하는 표현은 죽음의 분위기를 묘사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이 마치 어둡고 차거운 동굴 속에서 목을 웅크리고, 입을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괴물과 같은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에 보면 “사망”이라는 말은 없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말은 히브리어 “브게이 찰마벳”()을 번역한 것인데, 이는 “어두운 골짜기”라는 말이다. 아마도 킹제임스 역 (KJV)을 따라 영역본이나 한글 역본들이 “사망의 그림자가 있는 골짜기”(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라고 번역하며 ESV, NAS 등도 이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NIV, NET 등은 “가장 어두운 골짜기”(the darkest valley)라고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골짜기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고 있을 수도 있다. 유다광야의 깊은 골짜기는 대낮이라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막하고 무섭다. 한번 들어가 길을 잃으면 나오기가 힘든 곳이 여기저기에 있다. 끝이 곧 나올 것 같은 골짜기를 따라가면서 이제 곧 길이 나오겠지 하고 걷다보면 점 점 더 깊이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 강도나 짐승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시편 84:6에 보면 “바카 벨리”(눈물 골짜기)라는 곳도 있다.
사람이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이러한 골짜기를 지나가게 되는 데 다윗은 바로 이러한 때에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역 성경에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히브리어 “라아”라는 말은 “악”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더 쉽게 말하면 “나쁜 일”(bad thing)이라고 할 수 있다. “라아”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은 “톱”인데 이는 “좋다, 선하다”(good) “아름답다”(beautiful), “유익하다” 등이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 선하고, 유익한 것이었다. “좋은 아침”(Good morning)이라는 인사말도 현대 히브리어로는 “보켈 톱”이라고 한다.
그러나 뱀의 유혹으로 사람이 시험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나쁜 일이 생긴 것이다. 제일 나쁜 일이 죽음에 이르는 일, 악한 일이다. 우리는 평상시에 “죽음”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망의 그늘 아래 앉아 있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금 지나가고 있다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무엇인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작은 일을 더걱정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철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아예 인생이란 불안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존재 자체가 불안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으며, 내일 무슨 일이 나와 나의 가족, 나아가서 이 세상에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윗도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다니며 무슨 악한 일, 곧 나쁜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키 아타 임마디”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주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악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함께 하신 주께서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기를 안위하신다는 것이다. 안위한다는 말은 “에나하무니”()에서 어간 “니함”이라는 말은 “위로하다”(comffort, console)는 말이다. 목자의 지팡이(, rod)는 주로 사나운 짐승들을 막아내고, 싸울 때 쓰는 무기이고, 막대기(, staff)는 양들을 인도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히브리어 원어는 둘 다 막대기라를 뜻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고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을 막아 보호해주시고,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나에게 참 위로와 평안을 주신다는 것이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나와 함께하신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주시는 것이다.
유다 왕 아하스가 북왕국의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군사동맹을 맺고 남왕국 유다왕, 아하스를 폐위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으로 세우겠다고 침공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비록 아하스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 나라와 이방신을 의지했지만  “임마누엘”이라는 아들을 주셔서 다윗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시며 불안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셨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다윗이 사용하는 “임마디”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항상 나 함께 하시며,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나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목자이신 여호와이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예수님으로 오셨다.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에 그의 복음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사야서 9:1-2의 성취를 선언하신 것이다.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마 4:12)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그리고 죽음의 땅,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백성들에게 빛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윗이 그의 시에서 말하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자기를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실 그 목자,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사망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 진리의 빛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고쳐주시며,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내가 세상의 빛이라”(요한 9:5)고 선언하시고, 이 맹인을 고쳐주셨다. 사망의 음침한 어둠의 길을 걷던 자를 보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교시켰다. 그러자 요한 10장에서 예수께서는 이들이 목자가 아니라 강도요, 절도요, 삯군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한 목자 예수님 자신은 죽음의 그늘에 앉아 어둠 속에서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하여 “내가 곧 선한 목자이니,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는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나도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으니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어 놓는다.”(요한 10:14-14)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에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인생들의 그 마음을 아시는 목자이시다. 그리고 이 불안의 근본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지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인도하시며,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자기 목숨을 내놓으시겠다는 것이다.
다윗이 바라본 그 목자-하나님은 바로 이 예수님이셨다. “임마누엘”(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임마니엘”(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임마디”(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이다.
우리는 바로 이 사망의 음침한 죽음의 계곡에서 진리의 빛으로 오신 목자, 예수님을 믿고 따라 나가야 한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며, 참 빛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참 목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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