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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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월요일 저녁, 오산리 집회를 마치고 곤지암 기도원으로 향했습니다. 기도원은 제 영혼의 안식처요, 은빛포구와도 같습니다. 그곳에만 가면 마음이 평안해 잠도 잘 오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이튿날 저녁 자녀들과 손녀, 찾아온 장로님들마저 모두 내려가고 나니 갑자기 쓸쓸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잠시 기도원 마당에서 둥근 달을 쳐다보며 상념에 잠겼습니다.

산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습니다. 제법 쌀쌀한 가을바람이었죠.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확연히 들렸습니다. 오늘은 바람의 소리 속에 바람의 언어가 있는 듯합니다. 바람의 소리는 들었지만 바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지금이 처음인 듯 했습니다. “네 인생도 이젠 가을이 왔다고, 아니, 가을 산을 닮았다고 말입니다. 달빛이 차갑고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밤, 기도원 뒤쪽 산에서는 성하의 푸른 계절을 회상하는 노목들도 아쉽게 가을을 맞는 듯 하였습니다. 아직 가을이 문턱에 서 있는데 기도원 앞산 쪽에서는 벌써 단풍을 만들어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의 이야기를 듣고 옆 산에서는 동글동글 여문 알밤들이 톡톡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가을바람에 가랑잎들이 우수수 떨어질 텐데 그 잎새들은 가을의 흔적을 새기며 아련한 애수에 젖어 알밤들 위로 소복소복 쌓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람의 언어는 수많은 밤알 중 꿈을 꾸는 알밤들에게만 내년 봄 새싹으로 다시 태동하라고 속삭여 줄 것입니다.

저는 그 날 밤에야 바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떨어지는 알밤과 도토리, 그리고 바람에 굴러가는 마른 잎새들, 모두가 나의 삶이었습니다. 마침내 저도 바람에게 속삭였죠. “생명은 순환을 해야 살아남고 순환이 없으면 생명도 없죠. 초록의 생명 또한 봄에서 시작하여 겨울에 이르며, 땅에서 시작하지만 하늘에 이르고요. 그리고 하늘에서 땅으로, 다시 생명으로 이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순환이 사계를 잇게 하고 우리의 삶의 질서를 유지하며 보존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것을 움직이는 동력이 바로 그대 바람이지요.” 그러자 바람은 다시 내게 이야기를 하는 듯 하였습니다. “진정한 바람의 근원이 뭔지 아시나요? 그것은 루아흐, 하나님의 바람이요 생기지요. 그 근원의 바람, 생기의 바람을 받는 자가 진정한 생명의 순환을 일으키는 자이지요.”

이런 상념에 잠겨 있었는데 가을바람이 너무 차게 불어와 온 몸에 추위를 느끼며 코에서는 콧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래, 바람의 말마따나 내 인생도 가을이 시작되었어. 하긴 나도 외손녀를 둔 할아버지가 되었지 않는가. 벌써 내 인생의 알밤과 도토리도 바람의 이야기를 듣고 툭툭 떨어지고 있지 않는가. 나 역시 남은 가을인생에 바람의 이야기를 듣고 생기의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의 사자가 되리라. 게다가 세월이 흐르고 사계가 수십 번을 바뀌면 나 역시 저 산 위에 노목의 모습이 되겠지. 그리고 노목의 연가를 부르다가 마침내 싸늘한 겨울의 끝자락을 맞이하겠지. 겨울이 오면 다시 기도원으로 와서 바람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악수를 하는 겨울 끝자락에도 다시 바람의 새 이야기를 듣고 저 산 너머 그리고 또 그 너머에 있는 새로운 영토에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꿈을 꾸겠습니다.”

너무 바쁘고 정신없이 살다보니 이런 상념에 잠겨보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처럼 연휴를 맞이하여 기도원에 와서 이런 상념에 잠기고 머리를 식히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 시를 몇 편 썼습니다. 낮에 봤던 기도원 길가 언덕과 산 주변에 피어있는 들꽃들이 생각이 났거든요. 어쩌면 우리의 삶이 들꽃과 같을지도 몰라요. 우리도 추억이 있듯이 들꽃들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른 펜을 잡고 들꽃에 대한 시를 썼습니다. 그 중에 들꽃의 추억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그저 넓은 들녘에서 피었다 지고 마는 / 덧없는 운명 같지만 / 우리에게도 소중한 추억이 있어요 / 봄의 향연 / 여름의 잔인함 / 가을의 향기 / 그러나 그 추억들은 마른 꽃으로 걸려있을 때만 간직될 수 있지요 / 지금 우리를 베어 정성껏 엮어 햇빛에 말린 다음 / 그대 가슴 속 벽에 매달아두어 보세요 / 꽃잎도 빛바래고 향기도 사라졌지만 / 그대 가슴 속에서 한 토막 삶의 추억만큼은 / 소중한 향수로 영원히 남도록 해 드릴게요

아무리 시인이래도 목사는 목사일 수밖에 없어요. 목사의 시심이 들꽃과 일치가 되고 설령 제 자신이 들꽃이 된다 해도 항상 사람들의 가슴 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고 향수로 남고 싶으니까요. 이번 한 주간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작은 위로와 소중한 향수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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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바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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