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0
2018/10/19 11:0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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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오신 예수(요한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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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은 그 구성이 독특하다. 예수님의 행적 (Narrative)과 그 행적에 대한 해석 및 설교 (Discourse)가 이어지는 곳들이 많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대개의 경우 예수께서 행하시는 사건을 중심으로 설교하기를 좋아한다. 본문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법은 설교자의 자유이겠지만 자칫 저자가 다루고자하는 핵심을 비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요한복음 3장의 경우도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에 집중하다 보면 Narrative에 이은 Discourse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두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쉽다. 따라서 Discourse를 충분히 이해하고 Narrative를 그에 병행하는 예화로 다루는 것도 본장을 이해하는 데 좋은 방법일 수있다.
요한 3:18은 보통 사람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씀이다. “그분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으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 세상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이 세상을 어둠이라고 했다(19). 어둠에 싸여 있는 이 세상은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고(16), 영원한 생명이 아닌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두움에 싸여 있다.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들은 어둠을 사랑한다.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어둠의 땅, 바로 그곳이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족해 하시고 기뻐하셨는데 왜 이렇게 어둠과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어, 그에게 왕관을 씌우시고, 그가 창조하신 온 세상의 통치권을 위임하는 언약을 맺으셨다. 아담은 그의 언약의 종주이신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함으로 창조의 질서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선약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짓밟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하나님을 떠났다. 스스로 죄와 죽음이 왕노릇하는 어둠과 혼돈과 공허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세계에는 어둠과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어둠의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빛을 비추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적 저주를 받고 죄와 죽음에 갇혀 있는 어둠의 자식들을 구출하기 위한 그의 구원의 손길을 내미신 것이다. 아담을 대신할 새아담을 보내신 것이다.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이제 새아담의 “의” 때문에 모든 사람을 살려 빛과 생명 가운데로 나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담은 새 아담의 모형이라고 했다(롬 5:14). 창조 언약의 대표자 아담 한사람의 불순종이 온 세상 만물에게 어둠과 죽음을 초래했듯이, 구속 언약, 곧 새언약의 대표자 새아담 한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온 세상에 빛과 생명을 주시려는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새아담은 여자의 몸에서 낳지만,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만큼 권위와 능력을 가진 영적 존재여야 했으며, 그는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러야만이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이 되고, 그는 아담의 죄값을 치렀다는 분명한 증거로 이 세상에 빛과 생명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즉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담과 마찬가지로 새 아담은 새언약의 대표자로 왕관을 쓴 새로운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둠과 죽음의 권세아래 있던 옛아담의 백성들은 이제 새롭게 등극한 이 새 왕을 환영함으로 새로운 왕의 새나라의 새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안에서 빛과 생명이 역사하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새아담으로 은근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셨으며, 그를 믿는 자는 다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은(16)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를 전제한 말씀이다. 새 아담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옛아담의 연대성 안에 머물러 있고 죄와 죽음의 어둠 가운데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살펴보면 우리는 훨씬 본문의 의미를 쉽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니고데모는 당대 아스라엘의 유수한 학자요, 정치가요, 종교지도자요, 부자였다. 그러나 그는 어둠의 사람이다.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어둠 속에서 빛이신 예수님께 찾아 나온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본 후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자마자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위로부터 물과 성령, 곧 말씀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3), 처음 남과 거듭남, 아래로부터 남과 위로부터 남(3), 육으로 남과 영으로 남(6), 하늘의 일과 땅의 일(12), 빛에 대한 사랑과 어둠에 대한 사랑(19), 사랑과 미움(19),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하늘로 올라간 자(13), 세상에 대한 심판과 세상에 대한 구원(16, 17),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18) 등의 말을 서로 대조하여 사용하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나라와 새 아담의 나라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선을 그어 서로 왕래할 수도 없고, 서로 융합될 수도 없는 서로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그 소속과 본질이 다르다.
죄와 죽음으로 뒤덮힌 아담의 어둠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아담과 함께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그는 근본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빛과 생명과 사랑과 영의 나라이다. 어둠과 죽음과 미움과 육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말씀과 성령으로 다시태어나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로지 믿는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롭게 난 사람만 그가 세우신 새아담의 나라, 곧 새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그때 그는 새아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우신 새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 살지만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씨가 싹트고 자라는 새로운 생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와 도리에 밝은 니고데모는 이러한 언약적 구원의 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시며,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는 그의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위로 메달아 놓고 그것을 믿음으로 쳐다보는 자는 살리신 사건을 예로 들며, 예수님 자신도 메달려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새아담의 대속적인 죽음을 예언하신 것이다. 하나님 날의 새생명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에서 그 싹이 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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