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행복론 -90
2018/11/16 16:4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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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통에 숨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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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주님이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들어 “화살통에 감추”어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유신 체제하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투쟁하며 살아온 때가 그러하다.
유신 체제하에서 박정희 정부는 국가 위기 상황이란 명분으로1974년부터 1979년까지 9차례에 걸쳐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국민의 인권을 제한하고, 유신 반대운동을 탄압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1975년 남베트남이 공산화되자 국민의 안보 불안을 이용하여 반공 분위기를 강화하는 한편, 반유신 운동 세력을 탄압하고자 긴급 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긴급 조치 9호는 유신 헌법을 반대하거나 부정하고,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거나 이를 보도하면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민간인도 비상 군법 회의에서 처벌하도록 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심하게 제약하였다.
1978년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민주 공화당보다 높은 득표율을 획득하고,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면서 정권의 위기가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박정희 정부는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 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야당과 크게 대립하였고,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였다.
1979년 10월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격렬한 반독재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부·마 민주화 운동). 박정희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정권 내부에서 대립이 발생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됨으로써 유신 체제도 막을 내렸다(10·26 사태).
유신 체제하에서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탄압도 있었다. 길거리에서 전경들이 여성들의 핸드백을 조사하는가 하면(거부하면 경찰서로 데려감), 학생들의 지갑을 검사하기도 하고, 학생들이 봉사 활동을 위하여 운영하려던 ‘1일 찻집’을 불허하였다. 여기서 오는 답답함을 학생들은 청바지와 통기타와 장발 등으로 표현된 낭만을 추구하려 하였지만, 이 또한 장발 단속 등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유신 철폐”를 주장하며 꾸준히 데모를 하여 유신 체제의 불합리함을 알렸다. 나도 이러한 데모에 몇 번 참여하여 위기를 맞은 적이 없지 않았다.
그 날 나는 사범대 강의실에서 <국어학> 강의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근데 그곳에 총학생회 간부가 운동장에 모여 데모에 참여해 달라는 전갈을 해 왔다. 나를 비롯한 과 동기들은 잠깐 고민을 하였다. 그동안 몇 차례 데모로 인하여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진 것이 매 년 반복되던 터였다.
“이러다가 또 휴교령이 내려지는 거 아니여?”
충청도 출신의 창수형이 근심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과 학생들은 벌써 가방을 챙기고 일어섰다. 근데 너무 일직 나섰는지 운동장에 나가자 제일 앞줄에 서게 되었다. 학생회 훈련부장이 4열 종대로 맞추어 달라고 해서 서로 어깨 동무를 하고 운동장을 돌다가 시계탑 앞에 서서 “유신 철폐” 구호를 외치는데, 갑자기 완장을 두른 신문 기자들이 나타나 손을 더 크게 들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손을 높이 들고 구호를 외쳤는데, 그게 그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후에 아는 교수로부터 학교 근처의 고층 빌딩에서 기관원이 우리들을 찍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데모가 끝난 지 며칠 안 되어서 사범대학 현관 게시판에 대문짝만한 공고문이 붙었는데, 그 날 데모대 옆에서 주전자에 담긴 물을 나누어 준 P 여학생은 자퇴, 데모대를 이끌었던 학생회 간부는 휴학 처리 되어 군대에 징집되어 갔다는 사실이 나붙었다. 그것은 더 이상 데모를 하면 우리도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압박이기도 하였다. 학과 교수들도 데모 광경을 찍은 동영상을 보이며, 우리 과 학생들도 경찰의 견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그래도 데모는 계속 되었고, 그로 인한 휴교령으로 대학 4년간 강의를 들은 날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한 데모의 힘이었는지 졸업 후 직장에 다닐 때에 10.26 사건이 일어나 유신 체제는 종식되었지만, 또다른 군부 세력이 나타나 민주화 투쟁은 후배들에 의해서 지속되었다. 오늘날의 민주화가 되기까지에는 학창 시절의 투쟁이 한 몫 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면에 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요즘 오로지 집필 생활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는 내가 청년 시절부터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리고 집필을 통해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주님이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들어 “그의 화살통에 감추”어 오셨다는 사실로 느껴질 때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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