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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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온 교회가 떠들썩하더니 올해는 501주년이라고 또 곳곳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행사가 다양하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개신교회의 개혁이 요구되는 때는  없었다.
17세기 (1674) 네델란드의 개혁파 교회의 목사 Jodocus van Londenstein 이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이 된다”(el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the church reformed always reforming)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는 데, 오늘 날의 개혁주의자들에게 Semper Reformanda는 개혁주의의 가장 핵심적이고 귀중한 원리가 되고 있다.
개혁되지 않는 교회는 성경의 바리새인들처럼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 언젠가는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쓸모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념행사로 끝날 일도 아니고, 거창한 학술대회도 이제는 할 만큼 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간과하고, 비교적 소흘히 다뤄졌던 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온전한 종교 개혁을 이루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주의를 믿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가톨릭 사제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주장하며 중보자 노릇을 했기 때문에 생긴 주장이다. 그들은 죄인들의 죄의 고백을 받고, 속죄에 대한 처방을 내리고, 사죄를 선언했다. 그리하여 죄인들은 이 땅에서 오직 사제들을 통해서 죄인들이 사죄의 은총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반대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시며(딤전 2:5), 신자들은 직접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으며,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이 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사제들이나 목사처럼 성례를 집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강단에서 선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루터의 제사장직은 모든 신자가 다 전문적인 사제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복음을 삶 속에서 전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두가 설교자요, 사제라는 의미이다.
목회자들은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 일정한 신학교에서 신학과 영성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노회나 총회로부터 안수식이나 위임식을 통해서 목회자로서의 사역을 할 수 있다. 신자들은 신자로서 자기 생업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소명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며, 제사장으로서 전도와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와 심방과 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에게는 삼중의 직분을 주셨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 세 직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모든 만물 위에 앉아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며, 돌보는 왕,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그의 피조물에게 전달하고 가르치는 선지자, 그리고 피조물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피조물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가졌다. 이 세 직분은 어느 것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같이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사명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 사제들의 제사장직에 대한 비성경적인 신학에 대항하여 개혁을 주장하는 가운데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모든 신자의 제사장”됨을 특별하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모든 신자가 선지자라는 만인 선지자라는 점에  대한 강조는 빈약했다.
이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만인 선지자”론을 옳다고 하면서도 기울어져 가는 교세를 한탄하며,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항상 당황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우리는 선지자적 사명을 강조하고 선지자로서의 개혁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며, 하나님의 종말적 이상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루터나 칼빈이나 츠빙글리나 다 같이 성경을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을 통하여 개혁의 원리와 사상을 이끌어내고 가르친 위대한 성경선생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예배 시간에 말씀을 강론하는 일을 주로 했다. 말씀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평신도 성경선생을 양성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중에도 성경에 관심있는 자를 따로 모이게 하여 직접 성경을 가르친 사람은 츠빙글리였다. 그는 1519년 1월 1일에 스위스 취리히 대성당 시민 사제직에 취임한 후 주일예배에 마태복음 1장부터 강해를 시작했다. 이것이 성경의 연속 강해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공적으로 연속 강해를 했지만 이 연속 강해 방법을 취리히 종교개혁에 정착시키기 위해 1520년 여름부터는 사적으로 목회자나 성경공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했다. 바로 이 모임의 명칭이 “예언연구회”였다. 고전 14:1,“사랑을 추구하여라. 영적인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여라”는 말씀에서 따른 명칭이었다.
우리 한국말로 예언이라는 말은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예언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해석하고, 지키도록 가르치는 교육을 의미한다. 이 취리히의 예언 운동은 점차 그 세력이 확장되어 네델란드, 영국 국교도나 청교도에게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모임이 기초가 되어 여러 신학교가 생겨났고, 또한 이러한 성경공부 모임을 통한 훈련된 사람들을 통하여 취리히 성경이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이와 같은 평신도들의 말씀공부를 통하여 계속 성장해 갔다. 그러나 이 중요한 예언운동이 서구의 계몽주의나 합리주의에 떠밀려 점점 사라져 갔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운동을 뒷받침하고 대항할 신학적 기초가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예언과 방언에 대하여 가르치며 우리 성도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그 중에서 사랑이 제일 크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권한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지만 그보다 더 예언하기를 더욱 더 원한다.”(고전 14:3)고 말하고, 39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마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예언이라는 말은 바로 선지자로서 말씀을 대언하고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 예언하기를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종말대한 비전과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향힌 계획을 이해해야 답이 나올 것 같다.
하나님의 종말의 비전은 말씀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땅에 전파되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여 서로의 적대감을 버리고 사랑과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사야 11:9의 말씀처럼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여,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들의 태생적인 적대감을 버리고 함께 평화롭게 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을 말씀을 알게 하는 일을 해야 했다. 선지자는 그래서 여호와의 입이라고 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그의 자식과 그 가족들에게 명령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것을 그에게 이루려 하는 것이다”(창 18-19).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최초로 “선지자”라고 부르신다 (창 20:7). 민수기 11장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울면서 모세를 대항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모세는 이 백성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간청한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70명의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성령을 주어 예언하게 함으로 그들을 모세의 조력자로 세우신다. 이런 가운데 70명의 명단에는 들어 있으나 회막에 참석하지 않았으면서도 예언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여호수와는 모세에게 이들의 예언하는 것을 금지해달라고 청한다. 바로 이때에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민 11:29). 모세의 소원은 여기 70명의 장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다 선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그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어 그들이 예언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요엘 2:28-29). 모든 사람을 선지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때가 차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육신이 되어 선지자로 이 땅에 오셨다.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선지자로서의 복음사역을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 사역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한 알의 밀알로 죽고 부활하셨다. 이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선지자로 임명하시고 땅 끝까지 이르러 그가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명령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성령으로 이들에게 세례를 주셨다. 이 일은 오순절에 일어났다. 오순절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새 언약의 선지자로 인치신 사건이다.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땅 끝까지,  나가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자들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 모든 족속들에게 세례를 주라는 말씀은 바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선지자로 삼으라는 뜻이다. 신자들은 물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며, 성령세례는 바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임명을 받는 거룩한 예식인 것이다 (손석태, 『성령세례 다시 해석한다』 CLC, 2016).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씀을 가르칠 제자를 양성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다. “너는 많은 증인 앞에게 네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겨라. 그들이 또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이다.”(딤후 2:2). 우리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그 구원받은 신자들을 선지자로 훈련시켜,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쳐 선지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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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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